숲을 거닐며 하늘을 보고 바람 소리도 듣고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와 내 심장의 울림을 들으며, 새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걸으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해 지면서 왠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시끄러운 세상속에서 살고 있고 그러다 보니 여러 심리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자기소외이다. 우리는 내가 나를 대리고 살아가긴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채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다. 자기소외가 깊어지면 자기기준을 못 찾고 다른 사람의 기준, 이 사회가 좋다고 욕망이라고 정해준 것들을 내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 지면 내 안의 소망이라든지 진정 꿈꾸는 삶의 방향이라든지, 추구하고 싶은 삶의 가치라든지, 혹은 오랫동안 눌러 놓았던 감정이나 기억까지 되 살아나 그 것들로부터 치유가 가능하게 된다. 또한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 지면 수행자들이 깨닫고 싶어하는 가지본성도 밝아지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라고 했다. 이는 우리가 지금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 종국에는 나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규경 시인의 "용기"라는 시에는 다른 사람들이 너는 할 수 있어 용기를 내야 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서 "나는 못해요"라고 말했다 한다. 못하겠다는 것도 용기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 앞에서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닌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부지런히 곁눈질하며 따라한다. 행복의 요소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삶의 주도성이 내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할 때 행복하다. "어쩌다 한국인"을 집필한 심리학자 허태균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한다. 포기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닌 자기에게 더 맞는 다른 일을 하기로 스스로 선택한다는 뜻이다.
내 속의 너무도 많은 나는 크게 두 개인데 내가 스스로 원하는 "나의 나"와 가족이나 사회가 기대하는 "남의 나"가 있다. 어려서는 부모님의 통제와 배워야하므로 나의 나를 찾기 힘들지만 성인이 도어도 나의 나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남의 나로 살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고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암의 나를 완전히 무시하면 다른 사람과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그래서 남의 나와 나의 나 사이에 적당한 균형을 유지할 줄 아는 것이 어른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인 것 같다.
마음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불안에 머무르려 할 때, 현재 내 몸의 느낌에 집중해 보라. 지금 내 어깨가 어떤 느낌인지, 혹시 뭉치고 긴장돼 있는 건 아닌지. 지금 내 배와 가슴은 어떤 느낌인지. 주의를 내 안으로 돌려 몸 전체를 한 번 쭉 살펴 보라. 그렇게 하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빠져나와 현재에 머물게 된다. 과거는 어짜피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어렸을 때 어머니와 장보러 갔던 기억 등 작은 추억들을 되살린다. 이런 소소하지만 행복한 기억은 살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우리 영혼의 따뜻한 등불이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순간순간 행복했던 기억의 힘으로 살아간다.
보통 질투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나와 엄청 다른 사람이 아닌 대체로 나와 연관된 사람을 통해 일어난다. 그 감정의 농도가 옅으면 단순한 부러움으로 그치지만 진해질 경우 질투는 분노로 강한 미움으로 심지어 폭력으로도 전이된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상대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봤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없는 그 부분만을 바라보면 나 보다 더 행복하고 더 잘난 존재인 것 같지만 실재로 그 사람의 전체를 바라보면 나와는 다른 양상의 고뇌와 불안이 있지 내가 상상한 것처럼 마냥 행복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을 잘 활용하면 내 능력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과소비 조장의 욜로가 가고 소확행이 왔다. 획일화된 행복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하면서도 개별적인 행복의 기준을 세운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행복은 지금 현재 시간을 내가 어떻게 온전히 쓰는지, 자연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는지에 달려 있다. 자동차, 집을 소유하고 느끼는 감정이 아닌 것이다. 목표를 이루고 행복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달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또 다른 목표가 기다리고 있기에 항상 부족하고 바쁘다. 그러나 소확행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일상적으로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니 이 얼마나 좋고 감사한가.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내 문제점만을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럴땐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것보다 남에게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내 상황이 좋아진 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작은 도움도 차일피일 미룬다. 내 코가 석자야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영영 누군가를 도울 만한 시절을 만나지 모한다. 왜냐면 욕심은 끝이 없어서 괜찮은 상환이 와도 이것으로는 안 되고 더 괜찮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돕는 실천이 결국 우리 스스로를 치유하고 좀 더 완성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돕는 날이 결국 그 도움이 나를 치유하는 날일 것이다.
우리 곁에 사람이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데 이는 상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해서이다.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춘 채 사회적 시각에서 봤을 때 비난받지 않을 수준에서 안전하고 피상적인 만남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만남은 깊은 유대감이나 연결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누굴 만나도 마음에 공허함만 남는다. 외로움의 정체는 혼자라는 외적 상황보다 혼자여서 문제라는 내면의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경우는 사람들과의 연결감이 부재할 때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로움이 만들어 진다. 연결감을 회복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서로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아 외로운 것이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선 자기 기준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기 말고, 내가 조금 더 일하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고,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 생기거나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올라 왔을 때 나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내가 맡은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하고 물어 봐야 한다.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을 때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이 눈에 들어 온다. 즉 다른 사람의 흠은 어떻게 보면 내 마음 거울에 비친 내 흠이기도 하다.
우리는 꿈이 없는 깊은 잠을 통해 마음의 회복과 몸의 원기를 되찾는다. 이처럼 생각이 텅빈 공요한 마음 상태는 죽음이나 무료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쉼, 생명, 치유, 평화, 자유, 창조를 뜻한다.
생각과 느낌이 나라고 하는데 그럼 생각과 느낌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가? 아니다. 생각과 느낌 그 이전에도 있는 나는 무엇일까? 해민스님은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기 이전데도 있었고 그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결같이 있는 것이 바로 고요한 침묵이다라고 하셨다. 고요 속에서 깨어 있는 투명한 침묵과 만나시길 기원한다. 깊은 평온함과 영원한 자유, 생명의 원천과 따뜻한 사랑이 또 그 안에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