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책을 본 적도 없고, 사실 방송에 나온 것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알쓸신잡에 나오셔서 종종 지나가는 사진 정도만 봤다. 예스에서 책을 살 때 대부분 온라인으로 사서 실물을 보고 구매하는 일이 잘 없다. 요즘은 추천을 받거나, 읽었던 책의 참고도서거나, 같은 저자의 책이거나. 그래서 충동구매의 틈이 없다. 이에 반해 중고 매장이 문제다. 실물을 보고 나면 사고 싶은 책이 훨씬 훨씬 더 많아진다. 이 책도 실물을 보고 자꾸 손이 가는데, 망설이다가 펼쳤다가 구매했다.
-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이 소제목을 보고 안 산다고? 가능한가? 이런 멋진 제목이 붙어 있는 장이 몹시도 궁금할텐데 안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 중고 매장 갔다 하면.. 반월당점 생겼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다..) 여행의 이유나 의의 중에 하나가 그렇게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이 장을 읽으면서 많은 마음의 위로도 얻었다. 저자의 말대로 집이라는 오래된 공간에 뜻하지 않은 여러 상처들이 남을 수 밖에 없다. 그게 숨막혀서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충분히 여행의 이유가 될 것 같다.
여행을 좋아하는 소설가가 쓰는 여행을 주제로 하는 산문집. 덕분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 지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모든 소설가가 같지는 않겠지만 글 쓰는 사람은 멋있다!는 내 생각을 더 확고히 만들어 줬다. 일상에서 보이는 것들을 여러 가지로 묶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내는 것, 내가 의미 없는 것들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연결성. 감탄하고 감탄했다. 그런 능력이 있기에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첫 장 <추방과 멀미>를 읽고 홀딱 반했다.
-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18-19)
-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22)
여행에 대해서 나도 어쩌면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여행이 나에게 뭔가를 알려 줄 거라고, 여행을 떠나기 전과는 다른 썸바디가 되어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많은 이들이 가지는 환상이라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있다. 이는 어쩌면 좀 더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야 하는 지도 모른다. 패키지 여행이 깨달음을 줄 수 없는 건 뜻밖의 일을 맞닥뜨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마법적 순간을 모두 예방해 안정적인 일정대로 잘 헤쳐나가 무조건 성공적인 여행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
그렇기에 인생의 경로가 달라지게 하려면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틈을 줘야 하고, 그런 맥락에서 여행이 중요하다. 조금은 달라진 길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상을 걷다가 어느 순간 그 기점을 돌아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이는 의식적으로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리라. 그러니 나 자신을 좀 더 알고 싶다면, 내가 익숙한, 내가 언제나 통제한다고 믿는 상황이 아닌 전혀 뜻밖의 놀라운 곳으로 나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나를 알 수 있으리라.
-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132)
여행을 가면 순간 순간은 좋다고 느끼지만, 다녀오면 그 좋았다는 아련한 느낌만 남아 있고, 어느새 잊혀져 간다. 사진을 보거나 돌이켜 보면 그 순간에 일어났던 일이나 감정이 희석되어 마냥 좋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중략)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중략)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117)
저자의 말대로 여행을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는 듯 하다. 그래서 내 여행에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더해야 하는 구나.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생각해본 관점이다. 어차피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왔으니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른 이의 생각을 한 데 묶어 더 크게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같은 점도 보고 다른 점도 보면서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 하다.
인기 있는 책들은,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들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찾거나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147)
나는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내가 인간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저자가 들려준 외국에서 현지인을 믿고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다니면서 함께 구경하는 일이나, 늦은 밤 현지인의 차에 쉽게 올라타는 경험이 놀라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몇 번을 생각해도 난 결코 무서워서 못할 것 같았다.
저런 환대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게 환대라는 걸 내가 알아차리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이다.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지도 의심하는 자이기에 주는 것도 쉽지 않다. 나의 별 뜻 없는 환대가 그들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저자가 이야기 하는 그 아름다운 환대의 순환의 세상에 끼여들 수 없을 듯 하다.
나는 이상한 집순이다. 집을 나서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막상 나가면 잘 노는 편이다. 특히 여행의 경우 나가는 걸 무서워하고, 그 낯선 곳에 도착하면 몹시도 불안하고, 무서워한다. (어쩌면 여러 번의 여행지에서 겪은 말도 안 되는 일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여행기는 모험 소설과는 다른 측면에서 나를 안심시켰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과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없다는 것. 여행기의 저자 역시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낸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와 그것을 글로 기록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구조, 핵심 플롯이 있다. (198)
하지만 그런 불안감과 공포를 유발하는 것들은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익숙하고 편하지 않은 것이기에 나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다. 프레임의 전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불안감과 공포가 기반이라는 것, 그러니 불안감과 공포가 나를 묶어 두지 못하게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겠다.
저자의 마지막 문단이 와닿았다.
-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6)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일년에 여행 갈 수 있는 5일을 위해 300일을 일한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단지 여행을 가서 새로운 걸 보고 듣고 오는 것에 끝이 아니라,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말 그대로 ‘재충전’해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웃음을 지어보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새로운 관점을 들어보고, 새로운 생각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여행을 보내고 올 수 있다. 그렇게 일상을 다시 시작할, 저자의 말대로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나 보다.
문득, 떠나고 싶은 마음은 몹시도 당연하다. 지금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