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光復)이란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강압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주독립의 상태가 된 것이죠. 1905년 11월 17일, 혼돈의 조선을 거친 대한 제국의 황제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왕이 쓴 비밀문서를 내밉니다. 그것은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종이 쪼가리였으며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죠. 그러나 나라는 안중에도 없던 다섯 명의 역적(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들에 의해 조약은 체결됩니다. 이들을 가리켜 역사는 을사오적이라 부르고, 을사늑약(억지로 맺은 조약)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의 사건에 감동하거나 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 속 이야기를 알고 나서부터입니다. 역사는 먼 나라 이야기나 소설 속 로맨스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의 가식 없는 이야기, 감출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역사입니다.
을사오적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나라를 팔아먹었을까요. 그들도 분명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우리 말을 쓰며, 우리처럼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겉과 다르게 속은 개인의 안위와 영달 만을 좇는 파렴치한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광복이 없었다면 이들은 끝까지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바뀌었고, 나라를 팔아 영욕의 삶을 유지한 것에 비하면 그들이 저지른 일은 너무도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으니까요. 역사를 수레바퀴에 비유하는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역사가 돌고 돈다는 사실이겠죠. 하지만 돌긴 하는데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구를 때마다 수많은 굴곡을 거칩니다. 그리고 굴곡의 단면에는 생채기가 생겨 역사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책 『역사의 쓸모』는 굴곡의 단면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전체 속의 하나가 다시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죠. 하나의 사건과 인물이 그 시대를 말하고, 역사의 강은 그로 인해 바다를 이룹니다. 그 가운데 소소한 재미를 맛보는 것은 보너스에요. 최태성 작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입니다. 역사 강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손에 꼽는 사람이기도 하죠. 현재도 무료 강의와 다양한 방송을 통해 꾸준히 역사의 쓸모를 강변하고 있기도 합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분히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다만 큰 줄기는 얼추 비슷한 곳을 향합니다. 인류 역사의 옳고 그름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드러나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딱딱함입니다. 학교에서 교과 과정으로 배우는 역사는 연도별 주요 사건과 왕의 행적, 문화와 국가의 변천 과정에 이르기까지 다른 듯 보이지만 같은 내용을 무작정 암기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미를 느끼기엔 역부족이죠. 암기 과목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딱 거기까지거든요. 하지만 만약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약소국인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되기까지(83쪽)'를 생각하며 우리가 신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각자 신라의 주역이 되어 삼국을 통일 시키기 위해 소임을 다한다면 역사는 암기가 아닌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우리는 간과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대신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사가 아니더라도 무작정 암기하는 과목은 재미가 없습니다. 하물며 한창 학습 스트레스에 둘러싸인 학생들에게 낯선 과거의 일은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죠. 더욱이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과거는 현실과의 차이가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나 먼 옛날의 사람일지라도 똑같이 사는 것을 고민하고, 친구와 연인 관계로 인해 밤을 지새웠습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고 기본적인 삶의 틀 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과거의 삶을 공부하면 할수록 현재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를 어떻게 연결하고 비교할 것인가가 문제에요. 그리고 이 문제의 실마리를 『역사의 쓸모』가 해주고 있습니다. '품위 있는 삶을 만드는 선택의 힘,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하여'
책 제목처럼 '역사의 쓸모'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아마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학생 때와 달리 어른이 된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가령 뭔가 고민거리가 생기면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죠. 또는 대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때도 어김없이 과거의 인물이 소환되죠. 그냥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닦달하는 것보다 다산 정약용과 간서치 이덕무의 습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얻습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강요받는다는 생각보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되거든요.
이처럼 역사의 쓸모는 다양한 곳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내가 몰라서 버벅거리는 경우만 아니라면 막힌 길을 뚫는 묘수로 통합니다. 그리고 이런 엄청난 자료가 차곡차곡 정리되고 쌓여서 무궁무진합니다. 원하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에요. 오히려 문제는 딴 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지난해(2019)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고 올해는 광복 75주년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세대 간의 갈등과 이념의 대립이 극화되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첫째, 우리의 손으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제2차 세계 전쟁 막바지의 침략국 일본은 미국에 의한 원폭 투하로 기울어 가던 전세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일왕은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는지 바로 항복 선언을 했죠. 따라서 작전을 주도했던 미국이 우리나라가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문제는 광복을 맞긴 했는데 그냥 두면 알아서 잘 살았을 것을 막판에 숟가락을 얹은 소련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줄다리기에 졸지에 남북이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아무 힘이 없던 한반도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농락당하며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되었죠. 이후 벌어진 동족 상잔의 비극과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 되었습니다. 근래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한탄을 합니다. 정작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한 일본은 온전한데 한반도는 허리가 끊어진 채 살아가야 하다니......
둘째, 나누어진 남북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남쪽의 여자와 북쪽의 남자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한다는 내용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상당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는 직접 보기 전까지 왜 이 드라마가 인기가 있을까 이해가 안 되었어요. 뻔한 소재일 텐데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죠. 그런데 막상 내용을 보니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뉴스로만 보아오던 북한 주민의 일상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북한 사람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 이념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활 풍습이나 이웃에 대한 정이 오롯이 살아있는 모습에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총을 맞댄 적국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서로의 사상과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셋째, 하지 못한 일제 청산입니다. 신탁통치가 시작되고 남쪽에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이 사회 지도층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국민은 절대 원하지 않았지만 또다시 힘의 논리가 적용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정부 수립이고, 누구를 위한 안정이었을까요. 안타깝지만 여기에 국민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하며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를 외쳐보았자 내부의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거울이라 말합니다. 과거의 일이 거울처럼 고스란히 비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예전 사람들이 했던 생각과 행동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념과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고 오랜 세월을 보낸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거나 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배가 되어 더욱 크게 상처를 주게 마련이죠. 우리의 실정이 그러합니다. 역사를 오류를 바로 잡기는커녕 수렁으로 빠져드는 형국입니다. 그들에게 반성과 후회는 없어 보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영달 만을 바랄 뿐이죠. 오늘 최태성 작가의 책 『역사의 쓸모』를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듭니다. 통찰이란 것이 시간만 보낸다고 구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찾으려 노력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새로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마침 광복 75주년을 맞기도 해서 그 의미를 되새기며 책장을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