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후 유명화가에 대한 작품과 일대기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다소 전문성은 없으나 보통의 사람들이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 유명작가의 일생과 작품을 이해하는데는 좋았던 서적이다. 이책 이전에 방구석 미술관과 지식 갤러리라는 책을 읽어봐서 다소 중복되는 작가와 이야기가 있으나 내가 좋아하고 흥미롭게 읽었던 작가들에 대한 후기와 작품 감상평을 적어 본다.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는 역사화와 종교화에서 선구적이었던 이탈리아의 바로크 여성 화가로 성서에 언급된 여걸을 주제로, 동적인 인물상, 극적인 명암법으로 작품을 표현하였다. 아버지는 카라바조 화풍을 따르는 화가로 아버지 동료에 의한 강간으로 손가락 고문과 산부인과 검사까지 받으며 재판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느꼈던 치욕감과 오명으로 폭력적인 작품을 많이 그렸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자화상>, <야엘과 시스라>, 특히 <수잔나와 원로들>는 수잔나는 자신을, 곱슬 남자는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 동료로 묘사한 그림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네델란드 황금기의 3대 화가(렘브란트, 프란츠 할스, 베르메르) 중 한명으로 네델란드 소도시에서 직조공이며 여관(날아다니는 여우)를 운영하는 아들로 출생하여 죽을 때까지 고향과 고향사람을 화폭에 담았다. 부유한 카톨릭집안의 아내를 맞이하고 카톨릭으로 개종, 부유한 삶을 살며 1년에 2∼3편의 그림을 그리며 평생 35점의 작품만 남겼으며 풍경화는 단 두점이다. 부유한 삶으로 작품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소수에게 그림을 팔아 35점의 작품중 21점이 한사람에게 팔렸다. 말년에 프랑스가 네델란드를 침략하자 경제가 파탄나며 43세에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고요하고 정적인 찰라를 잘 묘사, <진주귀걸이의 여인>별칭이 북구의 모나리자로 눈썹도 없다.
폴 세잔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로 20세기 현대회화의 아버지, 모네로부터 독창적 개념을 터득, 모네가 빛으로 보이는 찰라 순간을 포착하는데 집중한 반면 세잔은 빛으로 매순간 변하는 모습을 다시점으로 표현하였다. 아울러 색과 형태는 단순히, 모든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본다 라고 하며 균형과 조화로 화면을 구성하였고 색채는 야수파에, 원근과 시점파괴(다시점)는 큐비즘을, 말년의 추상형태 작품 <생트 빅투아르 산>은 몬드리안에게 영향을 주어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피카소는 세잔을 유일한 스승으로, 마티스는 회화의 신으로 폴 세잔을 칭송하였다. 비주류의 은행가 출신 아들로 학창시절 에밀졸라와 친분, 피사로와 만남으로 인상파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속 색이 기괴하여 임산부에 충격을 준다고 비평할 정도, 활동 당시에는 이단아로 취급, 후대에는 현대미술의 영웅으로 불리웠다. 인상파로서 자신관의 작품세계 구축하였는데 사과 표현시 인상파들은 사과에 비치는 순간적 빛의 변화를 표현 했으나 세잔은 빛이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부분 부분 적용시켜 입체적 이미지로 표현 <사과가 있는 정물> 완성하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과 셋(이브의 사과, 뉴톤의 사과, 세잔의 사과)중 하나로 불리게 되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2017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가 1700억원에 팔리기전까지 최고액 낙착 작품으로 유명,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는 추상예술의 백미로 불린다.
빈센트 반 고흐는 렘브란트이후 네델란드 최고의 화가로 사후 최고의 화가에 오른 너무나도 잘아는 화가.생전 팔린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1점, <데이지와 양귀비 꽃병>을 가셰박사에게 약값으로 지불한것, 네델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며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했으나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동생 테오가 후견인, 독학으로 그림 터득, 초기에는 종교적 부름으로 화가되었다고 생각하여 농부를 통해 노동의 의미를 전하였으며 <감자먹는 사람들>이 대표 작품이다. 파리에서 아를로 이주, 고갱과 함께 작품활동, 그러나 성격과 그림에 있어서 상반되어 마찰을 빚어 같은 모델인 마담 지누를 고갱은 천박하게 고흐는 고상하게 그렸다고 서로 비난할 정도였다.
에곤 쉴레는 오스트리아에서 역장아들로 출생하여 이전에 없던 노골적 19금 누드화를 묘사로 유명세를 탔다.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성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의 감정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고 학교와 미술을 배우기 위해 들어간 빈 아카데미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17세에 크림트와 만남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평생 교류, 크림트가 모델로 발리를 소개하여 많은 작품에 그녀가 등장하였으나 쉴레와 헤어진 발리가 종군간호사로 1차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하는 아픔도 있었다. 누드화로 인해 미성년자 유괴, 풍기문란으로 무죄를 받았지만 경찰서 신세를 지고 그림을 불태우라는 재판결과에 충격을 받아 은둔생활하였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전쟁중 입대,그림재능을 인정받아 박물관에 근무하는 혜택도 누리다 스페인독감으로 임신한 아내가 죽고 3일뒤 쉴레도 사망하였다.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로 유대인, 러시아 유대인 정착촌에서 쌍트페테르부르크로 무작정 상경하여 미술을 배우고 파리에서 인상파 및 야수파 등 미술과 특히 렘브란트의 빛의 대비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회화를 구현하였으며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의 어둠과 밝음의 빛에 인상을 받아 샤갈은 다채로운 색채로 빛을 구현하였다. 파리에서의 첫작품이 유명한 <눈내리는 마을>, 잠시 귀향시 1차 대전 발발로 여자친구였던 부유한 보석상의 딸 벨라와 결혼하며 벨라를 대상으로 <생일>,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 초상> 등을 그렸고 러시아 혁명시 정부가 인정하 예술인으로 인정받고 활동하였음에도 국가 대표화가에서 소외당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자 파리로 돌아와 귀화하였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 이후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숙명인 구약 삽화 작업에 몰두 105점의 <구약성경>을 출간하고 그중 12점으로 <성서 아이야기> 제작하였다, 샤갈의 회화 주제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영원한 사랑으로 작품 대다수가 사랑이 주제이다. 샤갈은 유대교의 하시디즘 종파로 이종파는 죄를 지으면 동물이 된다고 믿어 샤갈의 그림에는 닭, 말 등 동물 등이 등장하며 특히 소는 러시아대륙을, 바이올린은 유대교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