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20세기 세계사의 열한가지 큰 사건을 다룬 책이다. 큰 사건은 작은 사건의 집합이므로 사실상 수백가지 사건을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장면이 있는 11가지 사건으로 20세기가 끝나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그런 사건을 고르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적 거리는 생긴셈이다. 전직 장군들이 양복을 입고 우리나라를 지배했고 말할 자유가 없었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이 많았으며 사는게 고르지 않았다. 가정, 학교, 군대, 회사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에 폭력이 난무했다. 나머지 절반의 인생은 모든것이 웬만큼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살았다고 한다. 역사를 안다고 해서 무슨 쓸모가 있을까마는 나는 그저 아는 것 자체가 좋아서 다른 나라 역사를 공부했다. 심오한 역사 철학이나 역사 이론은 없다 사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보뿐이다. 초판 원고를 쓰던 1987년 최루탄 가루 날리는 거리에서 낮을 보내고 구로공단 근처의 벌집 자취방에 돌아가 밤새 볼펜으로 원고지에 글을 썼다. 그때 세계는 냉전의 막바지에 있었고 대한민국 국민은 독재의 담벼락을 무너뜨렸다. 나는 독재자가 국정교과서와 신문 방송을 동원해 국민에게 주입한 역사 해석과 싸우려고 그 책을 썼다.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라는 이념의 색안경을 벗지 않고는 문명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1995년 개정판에서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 독일 통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정부의 평화협정 체결 같은 사건을 반영해 내용을 보충하고 이오덕 선생이 우리 글 바로쓰기에서 제안한 방법으로 문장을 바로 잡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판에 대한 검열과 규제를 폐지하자 수준 있는 세계사 책이 서점에 나오기 시작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독자의 관심을 끈 이유는 사건 자체가 지닌 이야기의 힘 때문이었다. 드레퓌스 사건부터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까지 모든 사건이 극적이었다. 등장인물의 삶과 죽음은 인간의 본성과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419 혁명은 졸저에 상세하게 서술했다. 일본이 역사 왜곡은 세계사의 주애 사건으로 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으며, 러시아혁명은 두 꼭지를 하나로 합쳤다. 20세기 세계사의 위대한 성취인 민주주의와 디지털 혁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며 글을 썼다. 1987년에는 자료가 많지 않았고, 정부가 출판을 검열하고 판매를 통제했다. 어떤 책이 있는지 몰랐고 아는 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초판 참고자료 중에는 소지한 사실이 발각되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당할 만한 것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와 정반대로 정보의 바다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구할 수 없는 책은 거의 없었다. 필요한 세부정보는 무엇이든 검색엔진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민주화의 미력이라도 보탠게 뿌듯했고 고마웠다. 교과서와 언론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그린 그림을 바로 잡으려다보니 초판은 반대편으로 치우친 면이 있었다. 우주의 시간에서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원자 배열상태의 일시적인 변화 뿐이다. 역사의 시간은 다르다. 적어도 태양은 영원하다. 태양도 언젠가는 별의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역사의 시간은 그러기 전에 끝날테니 그렇게 말해도 된다,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역사의 시간도 너무 길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한다.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 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권력자가 황제를 칭한다고 해서 제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역사와 문화와 종교가 상이한 여러 인간집단을 하나의 질서 아래 통합한 국가라야 제국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제국도 20세기의 강을 살아서 건너오지 못했다. 제국주의도 소멸햇다. 현대의 제국주의는 단순한 정복욕의 표현 형식이 아니었다. 열병과도 같던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지나갔다. 지구는 작아지고 세계는 한마을이 됐다. 어떤 것은 진화의 시간 속에서만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