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칼의 노래를 읽었다. 무슨 내용일까 단지 그 궁금증 때문이었는데. 그 이후 난 김훈 선생의 팬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그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는데,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흡사 그 안에 살아계신 듯한 이순신 장군이 김훈 선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했었다. 단어들은 살아 있었고 문장들은 그 감정의 골을 따라 꿈틀거렸다. 칼의 노래를 읽는 동안 너무 힘들었다. 매 순간 이순신 장군께서 겪었을 그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난 김훈 선생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현의 노래, 개, 남한산성, 공무도하, 흑산, 공터에서, 달 너머로 달리는 말, 하얼빈까지. 새로 출간되는 소설을 찾아 읽게 되었다.
선생의 소설은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현의 노래에서 흑산까지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글로 쏟아져 내려 다시 구비치고 쓸려가면 읽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했다.
오랜 만에 새로운 책 허송세월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읽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즐겨읽던 소설을 아니지만 산문으로서도 충분히 선생이 말하고 싶은 것들을 전달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책 표지 오두막에 앉은 이가 왠지 선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첫 문장부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글솜씨이다.
언제부터 인가 부고는 배달상품처럼 쉽게 눈 앞에 왔고 또 쉽게 그 화면에서 조의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이 죽음이란 걸까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들이 견딜만 해지면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저절로 끊기 전에 저절로 물러서게 되니 좋은 일이지. 그래 저절로 물러남을 안다는 것을 행복한 일이 아닐까?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네가 안 피우면 끊는거다. 라는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나는 창피했다.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서 담배를 피운다. 중생이 어리석음은 한이 없는데 나는 이 어리석음과 더불어 편안해지려 한다.
누구는 자신의 기준과 가치, 신념을 내세워 나를 그리고 내주변의 것을 날카롭게 몰아 세우곤 한다. 그런 것이 절대진리가 아님에도 우리가 어리석음을 알지만 그 어리석음과 더불어 편안하게 살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때문일까?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다를 뿐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서로를 미워하는 것은 왜일까?
원한이라는 것이 죽음을 넘어서까지 이러져야 할 것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죽음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일까?
답도 낼 수 없는 그런 질문을 나도 같이 해본다.
나이를 먹으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도 뿌옇다.
어느정도의 나이가 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질까? 마치 백내장이 낀 것처럼 내 앞의 시간이 뿌옇게 되어 그 구분이 힘들 때가 올까
그런 때가 오면 난 삶을 사는 것일까? 죽음을 사는 것일까?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 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이 책의 제목 허송세월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제였을까 여유롭게 해를 쪼이면 시간을 보내본 시간이. 아무래도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런 시간 조차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선생이 이야기한 그 바쁜 젊음의 시절과 지금의 허송세월이 여전히 바쁜 시간 속에 있음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는지? 세월은 누구에게나 흘러와서 흘러가는 것이겠지만 누구의 세월은 값지고 누구의 세월은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님을.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내 몸과 마음이 빛과 볕으로 가득 차는 이 허송세월이 값지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