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쟁, 기근, 자연재해, 정치적 실책, 부패, 예산 삭감, 질병, 대량 해고, 테러 등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부정적 뉴스를 접하며 산다. 사고 나지 않은 항공기나 별문제 없는 작황을 보도하는 기자는 일을 계속하기 어렵다. 점진적 개선은 그 규모가 아무리 대단하고 수백만 명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해도 신문 1면을 장식하기 어렵다. 게다가 언론의 자유가 더욱 커지고 첨단 기술이 발달한 덕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소식을, 많은 재난 이야기를 접한다. 수백 년 전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전역에서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을 때 그 일은 당시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중국에서 중앙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대량 기근이 발생해 시골 사람 수백만 명이 기아로 죽었을 때 유럽에서 붉은 공산주의 깃발을 흔들던 젊은이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과거 어떤 종 전체 또는 생태계가 파괴되었을 때 누구도 그 사실을 알거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류의 다양한 발전과 더불어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도 놀랍도록 개선됐다. 이처럼 좋아진 언론 보도 자체가 인류 발전의 표시이지만, 그 덕에 사람들은 정반대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활동가와 로비스트는 일정한 추세에 일시적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전반적으로는 분명히 발전하고 있는데도 마치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교묘히 포장해, 과장된 우려와 예측으로 사람들을 겁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1990년 이후로 범죄가 줄어드는 추세다. 실제로 1990년 1450만 건을 약간 밑돌다가 2016년에는 950만 건을 한참 밑도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거의 매년 끔찍하거나 놀라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위기'라는 보도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은 항상 범죄가 점점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꾸준히 악화된다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뉴스는 현재 일어나는 나쁜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뉴스가 유발하는 암울한 기분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 탓에 더욱 심해진다. 우리는 역사를 장밋빛으로 기억할 뿐 아니라 1년 전, 10년 전, 50년 전에도 끔찍한 사건이 지금처럼,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는 착각에 빠져 더러는 스트레스를 받고, 더러는 희망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근거도 없이. 사람들은 또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말하면서 아무 생각도 안하는 것 같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은 생각이 아닌 느낌을 말할 뿐이다. 여러 자료를 제시해도 세계가 점점 좋아진다는 데 동의하기가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터무니없이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자아이의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면 여자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세계 최고의 아이디어 중 하나였음이 입증되었다.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사회에 더없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노동력이 다양해지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어머니가 교육을 받으면 자녀를 적게 낳고, 아이의 생존율도 높아진다. 그리고 각 아이의 교육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다. 변화의 선순환이다. 부모가 가난해서 아이를 모두 학교에 보내지 못할 경우 남자 아이부터 보내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1970년 이후 놀라운 발전이 일어났다. 종교, 문화, 대륙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부모가 아이를 모두 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어, 아들뿐 아니라 딸도 교육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은 초등학교 취학 연령의 여자아이 중 90%가 학교에 다닌다. 성별 차이가 거의 사라진 셈이다. 1단계에서는 특히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중심으로 여전히 성별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 부문에서의 이 같은 발전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이런 발전을 축하하는 것과 더 큰 발전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은 상충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룬 발전을 보면 여자아이는 모두 학교에 다닐 수 있으며, 그러려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어리석은 오해로 희망을 버린다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작가는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