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 2,077채으로 이루어진 기록물입니다. 한 책의 두께가 1.7센치미터인데 이것을 차례로 쌓아 올리면 무려 아파트 12층의 높이가 되는 양입니다. 전부다 읽으려면 하루에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란 긴 시간이 흐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만드는 과정에서 굉장한 정확성이 요구되며, 그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실록과 같은 기록물들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문덕황제실록, 삼대실록이 있으며, 베트남에는 대남식록, 중국에는 대명실록과 청실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일본, 베트남의 실록은 주로 왕실에서 일어난 정치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민초들의 다양한 삶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생존했을 때 만들어지지 않고 승하하고 난 뒤에 편찬이 시작됩니다. 임금이 승하하면 춘추관에서 실록 편찬을 위한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만들고 이곳에서 사초 승정원일기, 시정기, 상소문, 개인 문집과 같은 여러 자료를 모았습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 취급한 문서와 왕명의 전달 등을 정리해서 기록한 일기이며,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 말할 때 기침하고 화낼 때, 심지어 화내고 눈물 흘리는 것 까지 옆에서 속기한 걸 다시 정리한 기록입니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일반 선비부터 재상까지 왕에게 간언했던 상소문도 포함됩니다. 그 이후 실록청에서는 역대 선왕들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아 함께 의논합니다. 이 과정은 성경책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케아 공회에서 성직자들이 모여서 서로 의논하여 복음으로 정리한 게 성경이듯이 사관들이 열띤 논의와 검증을 거쳐 만든게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이렇게 엄격히 만들어졌지만 때때로 그 공정성을 위협받기도 합니다. 보통 왕조국가의 특성상 아버지 아들 손자순으로 왕위를 이어가니 혹여 우리 아버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업적을 폄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과 궁금증이 생길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관들은 절대로 왕이 선왕의 실록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조차 볼 수 없었던 말 그대로 국가기밀문서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몇몇 왕들은 기를 쓰고 이를 보고자 했지만 사관들과 신하들이 목숨걸로 막았다고 합니다. 이런 왕의 궁금증을 완화시켜주기 위해 사관들은 선왕의 모범적인 내용만을 편집해 왕에게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국조보감입니다. 국조보감의 편찬 배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부르는 세종 때 편찬된 것입니다. 아버지 태종의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은 이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나고 신하들이 왕을 뜯어 말립니다. 당시 명재상이었던 황희는 세종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역대 임금으로서 비록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있더라도 본받을 일은 아닌가 합니다. 조종의 사기는 비록 당대는 아니나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갖고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걸 알면 결코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며, 신들 또한 이를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조차도 조선왕조실록을 보지 못한것입니다. 어떤 것은 실록이고 어떤것은 일기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쫓겨난 임금에 대해서는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일기의 주인공은 쫓겨난 왕이기 때문에 왕자로 강등되어 훗날 군이라 불리게 됩니다. 쫓겨난 왕은 총 3명입니다. 연산군, 광해군과 단종이 있습니다. 단종은 폐위되면서 노산군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쫓겨난 왕의 경우 실록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일기를 붙입니다. 노산군일기,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가 되는 것입니다. 노산군의 경우는 많이 억울해서 조선 후기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면서 단종실록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는 2번 기록된 실록이 있습니다. 선조의 재위시절 기록한 선조실록은 선조수정실록이라는 또다른 실록이 존재합니다. 서인이 다시 집권해서 선조수정실록을 썼으면 그 이전의 선조실록은 후세가 마땅히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로 보관하되 선조수정실록과 따로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