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그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유시민의 유럽도시기행 2권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보다 3년쯤 전에 출간된 유럽도시기행 다시 들춰보게 된다.
내가 유럽에 근무할 당시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하며 방문했었던 유럽의 대도시들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에서 둘러봤던 수많은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공원, 탑 등 도시의 모든 것들은 저자는 그저 '텍스트(text)'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소위 여행객들이 많이 들르는 유럽의 대도시들이라 하면 각 도시별로 방문객들이 많이 둘러보는 명소야말로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당시 그들이 처해 있었던 역사적, 문화적 시대 환경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이상 일생에 한 두번 볼까말까하는 유적지, 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수박 겉핥기식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 저자가 말하는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텍스트를 제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는 유시민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유시민씨만큼 역사, 문화, 시대상에 대한 지식과 교양이 풍부하지 않은데, 책에 나와있는 콘텍스트를 100% 숙지하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여행했었던 그 유럽의 대도시들에 대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고, 그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도시의 역사,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나마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기에 충분한 독서 시간이었다.
유시민의 유럽도시기행 2에 소개된 4개의 도시,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중 내가 여행지로 가보지 못했던 드레스덴을 제외하고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해보면서 후기를 마치겠다.
빈(비엔나) : 오스트리아의 빈 시민이 제일 사랑하는 두 인물(모차르트, 시씨) 중 시씨라는 황후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본래 엘리자베스 황후는 부다페스트 교외별장에서 지내면서 헝가리 말을 배우고 헝가리 시녀의 보살핌을 받았다. 시씨 황후는 헝가리 무장독립투쟁 지도자 언드라시를 지지하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중재자 역할을 통해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탄생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1889년 시씨 황후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루돌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언드라시가 죽자 삶의 의욕을 상실한 시씨 황후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가 휘두른 칼에 숨을 거둠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시씨 황후는 역사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오스트리아인들로부터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
링의 중심에 위치한 슈테판 성당은 왕가의 영묘였다.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관이 있으며 지하에는 카타콤베가 있다. 슈테판 성당은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14세기 초부터 200여년간 재건되면서 고딕 양식으로 변모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조촐한 장례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프라하 : 얀후스의 종교개혁이 인상 깊었다. 1419년 7월 30일 제1차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으로 급진 후스파 군중이 시청사에서 시장과 판사를 포함하여 보헤미아왕의 신하 일곱 명을 창밖으로 던져 죽임으로써 설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교회 재산 몰수와 정치 개입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그로부터 200여년 뒤인 1618년 프라하 귀족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 세 명을 프라하성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진 제2차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이 발생했는데, 3층에서 떨어진 신하들은 목숨을 구했으나 보헤미안 반란은 30년 전쟁으로 비화했다.
부다페스트 : " 나는 부다페스트를 다른 어떤 도시보다 좋아한다.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프라하성지구에 해마다 200만명 관광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헝가리는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인데, 외세에 둘려싸여 오랜기간 타 민족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숱한 전쟁을 치렀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픔이 많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헝가리의 너지 임레 총리는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개혁파 정치인 너지 임레가 자주노선을 표방하며 서방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소련 정부가 개입해 정권을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부다페스트의 학생, 지식인, 예술가들은 공산당 독재를 비판하는 대중운동을 시작했으나 소련군의 핍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너지 총리는 소련군에 의해 루마니아로 끌려가 사형에 처하게 된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석공 일을 배우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 포로가 되기도 했던 너지 임레 총리는 공산주의자로서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 데 참여했고 코민테른의 헝가리 대표를 지내기도 했지만 헝가리 농민과 노동자들이 식량 부족에 신음하는 처참한 현실을 보고 서방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고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려던 꿈을 실현코자 했으나 여전히 헝가리 국민들의 정신에 깃들어 있어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