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도스토옙스키를 수년간 연구한 고려대 석영중 교수가 해설한 <백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소설로도 유명한 이 책은 그가 특별히 애정을 쏟은 책으로, 후기의 대작 중 가장 서정적이고도 어렵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쓴 책이라 그런 듯하다.
이 책에 대해 논하려면 석영중 교수에 대해 먼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문학을 조금 안다는 사람, 러시아를 조금 배워봤다는 사람은 석영중 교수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노어노문가 출신으로서 교수인 동시에 작가다. 이 책 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깊게 읽기>,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매핑 도스토옙스키>, <인간 만세>, <자유>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가난한 사람들>, <백야 외>,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 자먀틴의 <우리들>, 스투루가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등이 있다. 그가 지은 책과 번역한 책을 모두 합하면 총 102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받았다. 2000년 한국 백상 출판 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노어노문상 한국 역사에도 길이 남을만한 위대한 석학이 분석한 <백치>라니. 이보다 기대되는 일이 또 있을까.
석영중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분석한 이 책은 토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어려우면서도 감동적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의 핵심 인자인 이미지에 분석의 초점을 맞춘다. 백치의 중심 이미지로는 철도, 칼, 그림이 있는데 소설의 구조와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 작가의 전기적 궤적을 총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수년간 작가에 대해 연구한 석영중 교수의 애정이 맞물려 <백치>에 대한 해석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있다.
<백치>에 대한 연구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목표와 함께 그것이 반드시 써야 하는 소설임을 이야기한다. 이어지는 2~4부는 철도, 칼, 그림이 수많은 이미지를 파생하고 복잡하게 얽혀 서사를 이끌면서 대가의 치밀한 세계에 따라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인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수렴하는 과정을 따른다.
이 책에서 철도, 칼, 그림은 상인, 살인범, 그리스도와 각각 연관되고 거기서 돈, 시간, 신앙의 테마가 창출되며 그로부터 다시 정치경제학, 철학, 윤리학의 영역이 활성회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두 연결되는 이미지들은 다양하게 변화하고 증폭되면서 종국에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수렴한다. 이는 보이지 않은 존재를 보이게 하는데 작가의 소명이 있다고 믿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신념을 반영한다. 또한 서사에 질서와 균형을 더해 구조공학적으로 완벽한 형식미를 창조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295페이지를 길게 인용해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라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일은 예술 수용자의 몫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서 예술가와 수용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무덤 속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 것은 <신앙을 잃게 할지도 모르는> 죽음의 확실성이 아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죽음의 확실성 너머에 있는 불멸을 읽어 냈다. 그는 2차원 공간이 품고 있는 4차원의 세계, 칼날같이 예리하고 위태로운 찬과 반의 경계선에 선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영원성에 매혹 당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잘 보이는 신비한 광휘를 그는 스위스 미술관에 걸린 그림에서 읽어 냈다.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은 아마도 사도 바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24~25)"
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오랜 염원의 결실로 볼 수 있는 <백치>.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주인공 미시킨 공작을 탄생시킨 이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질문,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영원 속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될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