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들이 이 행성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결국 그들의 평판이 즉, 그들의 운명이 이러한 종류의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라는 사실이 항상 맞는 말 같지는 않다. 잡초들은 해마다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국제 무역으로 인해 전 세계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범세계적인 공짜 식객들이 전해졌다. 스트리가는 모양이 예쁘지만 기생적인 금어초이다. 원산지 케냐에서는 유명 인사들이 지나가는 길에 뿌리던 꽃이었다.,
1956년에 이 풀은 미국 동부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는 몇십만 에이커의 옥수수 밭을 그루터기만 남기고 초토화시켜 버렸다. 무늬황호장근은 숲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관목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정확하게 1세기가 지난후, 무늬왕호장그느이 여린 꽃술과 작고 우아한 가지는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이 나라에 들어온 가장 위험한 침입 식물로 여기게 되었다.
현재 런던 동부의 올림픽 개최지에서 무늬왕호장근을 퇴치하는데 예상되는 비용은 무려 7천만 파운드에 달한다. 이들 불법 식물종 중에 잡초 신세를 면하고 자신의 정체성이나 그냥 호칭이라도 바꾼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들 두 사례만 봐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잡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정의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어떤 곳에서는 관상용인 식물이 다른 곳에서는 악성 침입자가 된다. 수 세기 전에는 농작물이나 약초로 대접받던 식물이 그 지위를 잃고 숲속의 무법자로 변신한다. 그에 못지 않게 잡초는 식용 식물이나 아이들의 놀잇감 혹은 문화적 상징으로 길들여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방법과 어떤 이유로 식물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분류하는가? 그것은 자연과 문화, 야생과 길들여짐을 구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고 관대하게 그 경계에 선을 긋는지가 이 지구의 표면을 덮은 초록색 식물 대부분의 성격을 결정한다.
잡초는 부적절한 장소에서 자라는 식물로 정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다른 풀이 자라기를 바라는 곳, 또는 어떤 풀도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곳에 존재하는 식물이다. 스패니쉬 블루벨은 정원 밖에서 펴서 자라면 악성 외래종으로 여겨진다. 그에 반해 잉글리쉬 블루벨은 종종 정원 안에 침입하여 퍼지면 잡초가 되어 원래 블루벨의 자생지인 숲속 보로로 뽑혀 나가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식물의 적절한 생물학적 고향이라는 기본 개념을 넘어선 어울림과 장소라는 여러가지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 영역으로서 정원이라는 관념이 개입된다. 게다가 일종의 민족주의, 즉 스패니쉬 종의 더 자신만만해 보이는 종 모양 꽃과 앙상한 줄기가 아닌 영국의 녹음과 더 조화를 이루는 토종 블루벨의 부드럽고 켈트적인 곡선을 인정하는 미화적 애국주의까지 개입이 된다. 하지만 이 정의는 정교하지 못하다. 어떤 식물에 적합한 장소라는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못해서이다.
자연의 온화한 삼림지대보다 물푸레나무에 더 적합한 장소를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수목 관리인들은 수목들 사이에서 자라는 상업적으로 더 유용한 목재용 물푸레나무를 불량목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물푸레나무가 수목 관리인들이 힘들여 키워낸 선과물에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적합한 장소란 영토 , 즉 개인적이고 문화적으로 결정된 어떤 장소, 공간에 대한 긴밀한 조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잡초를 정의하는 기준도 시간이 흐르면서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호주 빅토리아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이주민들은 그들의 동료가 어떻게 고양헤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에서 불법 침입자로 전락했는 지 그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엉겅퀴가 말의 사료에서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그래서 신문으로 조심스럽게 싸서 돌 밑에 두었고 며칠후 그것은 자리를 잡고 자라나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따. 스코틀랜드에서 온 그 엉겅퀴가 20년후 온 대륙으로 퍼져서 성가신 존재가 되었고 급기에 여러 지방의 관공서에서는 그것을 뿌리뽐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할 만큼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