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이 담긴 술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또 어떻게 세계로 확산하였는지를 살핌으로써, 인류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로 하고자 한다. 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술을 정리하면, (1) 효모가 당분을 알코올 발효시킨 ‘양조주’, (2) 양조주들 증류시켜 알코올 순도를 높인 ‘증류주’, (3) 증류주 등에 허브, 향신료 등을 섞은 리큐어 즉 ‘혼성주’,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양조주는 증류기를 사용하지 않는 데 반해 증류주와 혼성주는 증류기를 통과시킨 술이 기본이 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술이든 술을 만드는 재료는 효모라는 미생물이고, 인간은 발효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뿐이다. 모든 술은 지름 0.005mm 정도 크기의 미생물인 효모를 통해 당분 분해, 즉 알코올 발효를 거쳐 탄생한다. 술은 신비적인 자연의 섭리로 만들어진다고 여겨져 왔으나, 미시적으로 보면 일종의 농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계에 있는 특별한 미생물 효모의 작용을 경험적으로 이해한 인류가 효모를 증식시켜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보리, 쌀, 기장, 옥수수 등 볏과 곡물 재배를 전제로 성립했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곡물이 없었다면, 거대한 문명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곡물은 인류로 하여금 밭을 갈고 수로를 만들게 하였으며, 이윽고 밀집된 도시를 탄생시키고 문명을 일으킨 에너지원이다. 지금도 지구상의 60억이 넘는 사람들 대다수가 곡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자명한 일이지만, 곡물은 ‘작은 거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류의 은인이다. 우리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술도 곡물에 크게 의존한다. 술은 곡물을 원료로 삼고 나서 비로소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대중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곡물을 원료로 하는 양조주가 양산됨으로써 술의 역사는 제2막을 열게 되었다. 큰 강 유역에서 성장한 4대 문명은 각 문명을 지탱한 곡물을 원료로 삼아 고유의 술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딱딱한 껍질로 무장한 곡물을 술로 바꾸려면 넘어서야 할 큰 장애물이 있었다. 곡물을 쉽게 알코올 발효가 되는 당분으로 바꾸는 과정이 최대의 난관이었다. 알코올 발효를 화학적으로 설명하면 효모(이스트)가 분비하는 치마아제가 글루코스(포도당)나 프룩토스(과당) 등의 단당을 분해하여 에틸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바뀌는 현상이다. 알코올 발효에는 당분이 필요하고, 전분(탄수화물)을 맥아당 등으로 바꾼 후 이를 다시 단당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수이다.
여러 문명을 지탱해주었던 곡물은 지역마다 풍토와 역사에 따라 달랐다. 이 때문에 곡물을 원료로 하는 술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곡물주에는 보리가 원료인 맥주, 기장이나 쌀을 원료로 하는 중국의 황주, 쌀을 원료로 하는 일본의 청주,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잉카제국의 치차 등이 있는데, 각 문명을 대표하는 얼굴이라 할 수 있다. 4대 문명을 발전시킨 곡물 중에서 가장 빨리 술로 만들어진 재료는, 가루로 빻은 후 발효 빵으로 만들어 먹었던 보리였다. 원래 곡류를 발아시킨 곡아에는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효소가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에서는 발아시킨 보리(맥아, 몰트)르 그 상태로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 보리는 술로 만들기 쉬운 곡물이었던 것이다. 쌀, 조, 기장을 주식으로 하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술 만들기가 좀처럼 번거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황주나 일본의 청주를 만들려면 특수한 곰팡이(중국에서는 거미집곰팡이, 일본에서는 누륵곰팡이)를 사용하여 피, 밀, 쌀을 당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거미집곰팡이는 따뜻한 곳에서 생기는 일반 곰팡이로 아시아 전역에서 술을 양조할 때 사용한다. 누륵곰팡이는 무성 생식을 반복하는 불완전균으로, 흔히 된장, 간장, 술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일본의 청주는 누륵곰팡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개성이 뚜렷하다. 중세 유럽에서는 맥주 제조가 발전하였다. 맥주에 쓴맛을 첨가하는 데 사용한 재료는 처음에는 버드나무 잎이었다. 이후에 홉이 등장하였다. 홉 식물 암꽃의 밑동에서 노란색 분말을 채취해 이를 맥주에 첨가하여 쓴맛을 내고 가스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하여 맥주를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