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는 단연 김훈이다. <칼의 노래>로 시작하여, <흑산>, <현의 노래>, <남한산성> , <공무도하>, <하얼빈> 등을 읽으며 그만의 간결하게 핵심을 찌르는 그의 문체와 현실주의와 허무주의적 성향으로 인간군상들을 그려내는데,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매 작품마다 나를 크게 흔들었다.어찌보면 한국인들이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의 장면들에서, 만연체나 신파조가 아닌 담담하고 간결한 문체로 패배자의 정서, 한의 정서를 표현하는 작가가 몇이 될까. 그리고 작가 본인이 밝히듯이 그러한 간결한 문체가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서 선택했기에, 그의 작품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현의 노래>는 가야의 망국 과정을 그려냈고, <남한산성>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그려 냈으며,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의 전투 속에서도 일어나는 정치다툼, 민중의 비참에 나타난 충무공의 내적 갈등에 큰 감동이 있었다. 최신 장편 소설이었던 <하얼빈>에서는 김훈 만의 시각과 필체로 안중근을 내면을 재구성하고, 거사가 이뤄지기 까지의 긴박한 순간으로 독자들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왜 안중근이 거사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거사가 무수한 난관을 넘고 성공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옥중에서 순국하기까지 그의 신념과 일치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현해낸 것이다. 이렇듯 그의 소설은 늘 나에게 큰 감동과 감명, 몰입을 선사했으나, 몇 편 시도했던 에세이는 그다지 큰 반향이 없었다. 뭐랄까 문호의 반열에 올라선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과 달리, 그의 내면을 솔직히 내비치는 에세이에서는 큰 몰입이 안되었던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된 그의 새로운 에세이 <허송세월>도 비슷했다. 이제 76세가 된 김 작가의 말년을 보내는 그의 다양한 체험, 생각들을 담아낸 에세이다. 절박한 시대의 도전에 응전한 영웅적 인물들이 그려진 그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제목부터도 <허송세월>이다. 그의 치열했던 작품활동도 허송세월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제는 좋아하는 술도, 취미(등산, 하이킹)도 중단하여 옛 시절을 돌이켜 보기도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 등에 다니며 든 생각 등을 담았다. 읽다보면 나도 자연스레 힘도 빠지고, 말년 모드로 허무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젊은 독자들이 읽기엔 다소 힘이 빠진다고 해야할까. (담담하게 써내려 갔지만 생명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작품활동에 대한 회고 등이 나오면 나도 덩달이 신이 날 정도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저자의 탄식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세상 너머를 알지 못하므로 시간을 받아들이는 내 새명의 순수감각에 의지해서 자연수명을 감당해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깜낭을 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말을 지껄였다. 깨달은 자들의 신념에 찬 자들의 고함을 나는 알아 들을 수 없었고, 중생의 말은 난세의 악다구니 속에 헝클어져서 중생들끼리 말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필경으로 생계를 이어 오는 동안 한 줌의 어수선한 말이 나의 이름으로 세상에 퍼져 있는 사태는 민망하다. 말하기의 어려움을 말해도 듣는 자가 없고, 이미 풀려나간 말에 대한 회환을 돌이킬 수 없으니 내 남은 날들은 언어에 대한 애증 병발의 착란 속으로 저물어 간다.”
개인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전도서>가 많이 생각났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의 외침. 하지만 전도서를 깊이 묵상하면 다음을 깨닫게 된다. 죄로 인한 정의가 사라지고, 여러가지 일시적인 탐닉으로 점철된 우리네 현실세계 속 삶에서도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나의 가족과 직업으로 이뤄진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이 세상 속의 유일불변의 하나님을 더욱 의뢰해야 한다는 것. 물론 기독교인이 아니면 전도서의 함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다. 아마 김훈 작가도 동의하지 않을텐다.
<허송세월>에 드러난 그의 작품활동에 대한 허무함과 회한 등이 읽혀지지만, 그래도 김훈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는 그의 솔직함에 더욱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가 민망했다고 했던 그 소설에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감동을 느꼈는가. 그래서 애독자 중에 한 명으로서 나는 그에게 이말을 전하고 싶다. “작가님, 허송세월 아니셨어요. 당신의 작품으로 수많은 역사의 장면과 인물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많은 독자들을 그를 통해 감동과 기쁨, 그리고 삶에 대한 자각과 반추까지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