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양귀자 작가님의 작품 중 내가 세 번째로 읽게 된 작품이다. 198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나성여관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분량이 꽤 많은 장편소설인 만큼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자세히 쓰여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성여관 주인 부부의 아들이다. 그는 삼수를 준비하다가 포기했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잘 날 없는 나성여관의 상황 때문에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지 못한 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네가 누나를 사랑한 것은 곧 너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겠지. 우리가 모두 그렇다. 너는 사랑을 준 만큼 사랑받고 싶었겠지만 인간 정신의 무게는 각각 다르다. 네 고집에서 깨어나. 누나는 어차피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떠난 사람이야. 누나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래서 그 행운이 인도하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늘에 비는 수 밖에."
주인공 아들은 누나를 매우 사랑하고 그녀에게 의지해왔다. 그런 누나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슬픔과 분노로 다가왔을 것이다. 위의 글은 그런 그에게 나성여관 투숙객 아저씨가 해준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준 만큼 그대로(혹은 그 이상을) 받고자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상대에게 실망감이나 상실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타인을 사랑할 때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하고 보상 심리를 갖게 되는 것일까?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야 말로 타인을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적막했다. 집에 있어도 마음 둘 곳이 없어 쓸쓸하기만 했다. 잠시라도 마음을 의지할 대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모두 내가 몸을 기댈까 봐 미리 뾰족한 바늘을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 주인공에게는 평소에 의지하던 형과 누나가 있었고, 그들이 자리를 비울 때에는 옆방 투숙객이 그 빈자리를 대신해주곤 했다. 그러나 그 투숙객에게조차 다가갈 수 없었던 어느날, 어린 주인공의 쓸쓸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주인공의 상황이 안타깝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다가갈까 피하고 공격할 준비를 하는 듯 느끼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모든 것들이여, 안녕. 만화의 주인공은 이 말을 남기고 고요히 죽었다. 고요히, 말이다. 나는 정말 고요해지고 싶다. 나는 고요히 죽을 수 있다면 폐렴이 아니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무섭도록 슬퍼져서 나는 엉엉 울며 어두운 길을 걸었다."
양귀자 작가님의 책은 대체로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조명한다고 느낀다. 그러한 점에서 책의 제목이 <희망>이라는 것은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기 시작할 때 쯤에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희망이라는 것은 밝은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둡고 외로운 상황, 다시 말하자면 희망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희망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한줄기 빛이나 동앗줄과 같이.
"악을 증오하지 않는 것은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악을 소멸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은 선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이 비열함은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는 비열함에 대항하여 싸울 무기로 정직밖에는 가진 게 없다. 지식은 이 투쟁을 위한 준비요 발판이 되어야 한다. 머리로 들어온 인식은 반드시 두 손과 두 발로 실천되어야 현상에 이바지한다."
삶의 부정적인 측면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삶의 긍정적인 면 또한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긍정적인 것만을 바라는 것은 그래서 모순이라는 것을 이 문장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부정적 측면을 회피하면서 어떻게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겠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