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미디어로부터 이 책의 추천을 접하게 되었다. 한강이라는 작가는 '채식주의자'만 알 뿐, 그녀가 80년 광주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소설을 쓴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제목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느낌은 플롯에 중점을 둔 소설이 아니라 어떤 캐릭터의 감정 묘사에 많이 치중되어 있을 것 같다는 것 이었다. 읽어보니 그랬다. 소년, 소년의 친구와 그 누나, 소년의 엄마, 그리고 작가. 힘을 가졌던 자들의 만행을 악랄하게 묘사하는 대신,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덤덤하게 그린다. 그런 분위기가 더 슬펐다. 차라리 격렬하게 묘사했으면,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그렸으면 마음이 덜 불편했을텐데.
그들이 얼마나 평범했는지, 또 얼마나 나약했는지가 생생히 느껴졌고 다만 남들보다 조금 용감하거나 혹은 조금 더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들이 평생 어떤 아픔을 갖고 살았는지를 그리는 방법으로 작가는 그날의 비극을 추억한다.
작가는 시민들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쌓아둔 장면을 죽은자의 시선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그렇게 짓눌려도 더이상 흘러나올 피는 없었어.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맨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무척이나 비극적인 장면을 이렇게 덤덤하고 무섭게 그렸다. 그런데 곧이어 이런 글이 이어진다.
자정 무렵이었던 것 같아, 가냘프고 부드러운 무엇이 가만히 나에게 닿아온 것은, 얼굴도 몸도 말도 없는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 몰라 난 잠자코 기다렸어. 혼에게 말을 거는 법을 생각해내고 싶었지만, 어디서도 그 방법을 배운 적 없다는 걸 깨달았어.
아마 그 혼도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어. 서로에게 말을 거는 법을 알지 못하면서, 다만 온 힘을 기울여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어. 마침내 체념한 듯 그것이 나가 떨어져나가자 난 다시 혼자가 되었어.'
작가는 이렇게 슬픔을 묘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형철 작가가 얘기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생각했고, 황현산 작가가 말한 두터운 현실을 사는 사람을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현실에 민감한데 두터운 현실을 사는 사람은 옛날의 시간도 현실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1980년 5월까지도 말이다. 같은 마음으로 세월호를 생각한다. 이 사건처럼 사람이 만든 재앙은 아니지만, 세월호 사건을 대하는 우리 사회가 한강 작가가 80년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았으면 좋겠다. 생명을 앗아간 비극을 지루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떠나간 아이들을 기리고 그들을 잃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낼 수 있는 우리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에 있어서는 한국 작가를 좋아하고 여성 작가를 좋아한다. 특출난 감성을 지닌 작가들이 쓴 글을 누군가의 가공없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작가를 좋아하고, 여성 작가들이 감정을 묘사하는 섬세한 방식을 선호한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다. 누군가는 철지난 80년 5월의 광주를 아직도 우려먹냐 할 수 있겠지만 그 지겹고 지겨운 광주의 얘기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전달해준다는 것이 그 불만에 대한 속시원한 답이 될 수 있겠다. 한강 작가를 알지는 못하지만 매우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데 이런 글을 쓴다면 정말 무서운 일일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읽은 한강 작가의 첫 소설이다. 다른 책들도 한 번 읽어봐야 겠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신형철 작가의 서평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나 역시 꼭 읽어볼 만한 소설이라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