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집을 펼쳐 들며 첫 귀절을 눈에 넣으려니 불현듯 스며드는 시림에 가슴까지 저며온다. 얼마 만인가. 나름대로 열심히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건만 그 가운데 시집은 거의 손에 꼽는다. 시에 대한 감정이 나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를 읊조릴 때의 순수함으로의 회귀에 벅차오르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잡기가 어려우니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나 중요한 것은 읽는 이의 마음가짐 때문일 것이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불친절이다. 함축된 언어를 사용하니 일견 당연해 보인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읽고 또 읽어서 진절머리가 날 때까지 곱씹어야 하는 글귀를 어느 누가 반겨주겠는가.
오늘은 이병률 시인의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을 손에 잡았다 - 읽었다는 표현이 부적절 한 것 같아 애둘러 바꿨다. 한동안 제목을 멍하니 바라보며 참 이쁘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자신을 쏟아내는 것보다 담아두는 것이 쉬운 사람이기 때문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시인은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데, 남하고 어울리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고 깊은 시를 쓰는 것과 연결이 되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독서신문 23.9.25) 시를 내면의 소리 또는 무언의 장막이라 말해도 좋은 이유이다. 남에게 말 할 수 없는 사연을 줄이고 줄여 표현하는 것 또는 말하고 싶지만 귀찮고 하찮은 무언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표현하게 되는 것이 시이다.
시를 읽는 마음가짐은 그때그때 매우 극명하게 달라진다. 감정이입이 되면서 무너지기도 하고, 격했던 감정이 순화되면서 정화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연의 에너지를 흡수하듯 전해지는 시언어의 순수함을 오롯이 전달 받았을 때 쾌감은 어떤 진통제보다 격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저자는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시는 사람을 물들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또한 그는 마야 안젤루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의 비중으로 평가된다'라는 말을 했다. 따라서 자신의 글이 누군가의 심장을 물들이고 진동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언어의 선택이 갈린다. 누군가의 심장을 물들이고 진동시키는 작업은 그 파동의 근원지인 '나'로 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시인은 말하고픈 것이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우주의 파동을 제일 먼저 느끼며 모든 것을 감내해냈을 때 비로서 하나의 언어가 탄생한다. 문제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탄생한 언어가 누군가의 심장까지 전달되기까지 새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진동과 반비례한다. 갈수록 진한 맛이 전달되기도 하지만 여운이 흐려져 본래의 생각과 감정을 잃어가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내게서 멀어진 감동은 누군가의 심장에 가닿기도 전에 맥을 잃어 버린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읽는 이의 적극적인 구애이다. 만약 자신의 삶, 또는 감정이 메마르다거나 새로운 감정의 교감을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시적 감동을 받기 위해 빨리 시에 다가가야 한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자연과 자신이 하나되는 느낌, 고요 속의 풍요를 함박 느끼기 위해서도 시는 필요하다. 복잡한 지하철이나 혼란스러운 업무 속에서 읽는 한 줄의 시는 생명수가 되어 온몸에 스며들 것이다. 이러한 시적인 순간을 만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자는 “혼자 지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혼자 있는 건 하나도 이상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를 잘 경영하는 사람이 세련된 사람이다. 혼자인 순간을 즐기면서 모든 것들을 천천히 바라볼 때 시적인 순간이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모처럼 읽은 시집 한 권에 많은 상념이 스친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누군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사랑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던 수 많은 인연과 현재를 이어주는 누군가의 애틋함. 책의 제목처럼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내 삶은 더할나위 없이 풍요로울 것 같다. 사랑이 그리운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