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는 마을이 있다. 축구공만 한 지구본을 돌리고 돌리다 보면 먼지처럼 작은 마을 하나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곳은 지구에 있지만 아무나 그 존재를 알 수는 없다. 신비로운 꽃과 나무가 가득하고,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산다. 날개는 없지만 요정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곳은 언제나 꽃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하늘은 시리게 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눈빛과 마음이 선한 이들이 모여 살기에, 그들은 '미음'이나 '아픔'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날이 선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늘 평화롭다. 이 마을에서는 세상에 빛이 되는 아름다운 능력을 가진 이들이 사람들이 사는 곳마다 온기를 불어 넣으며 달이 뜨면 은은한 달빛 아래 춤을 추고, 해가 뜨면 따뜻하고 눈부신 웃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살을 애는 몸의 추위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마음의 추위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남자의 마음에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마을 전체를 구석구석 꿰뚫는 오솔길을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마을의 지킴이로서 크고 작은 일을 맡고 있는 남자는 팔을 양 옆으로 흔들고 숨을 크게 내쉬며 자연을 만끽하다, 길가에 쓰러진 여자를 발견했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 머리가 검고 긴 여자는 어떤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들썩이다 남자가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고는 다시 풀썩, 쓰러지고 만다. 이 마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다.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 나뭇잎들이 날아들여 그녀를 받치며 푹신한 이불을 만들어 준다.
남자는 맥없이 기절한 여자 옆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 여자가 입은 하얀 원피스에 초록물이 배지는 않을지 신경쓰던 남자는 결국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그 옆에 앉는다.
어깨를 흔드는 가벼운 손길에 깨어난 남자는 잠에서 깨자마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 여자의 파란 눈동자에 자기도 모르게 짤려든다. 바다 같기도 하고, 하늘 같기도 한 깊은 눈동자는 빛이 비치면 파란색으로 보이고, 아름답고 긴 속눈썹을 깜빡이면 갈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자의 신비로운 눈동자에 반해 멍해진 남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다.
여자의 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남자는 놀라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귀까지 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 주춤거리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아주 예쁘게 웃으며 답한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율배반적이지만, 여자와 남자는 아름다운 능력을 가진 마을에서 예쁜 딸까지 낳고 평온하게 살았다. 신묘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나쁜 일에는 절대 쓰지 않는 이들과 함께, 봄의 다음 계절은 가을이라는 게 당연한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아갔다.
할 수 있는 일이 사랑밖에 없는 사람처럼 살던 여자는 문득 너무 행복해서 불쑥 불안한 마음이 든다.
깊은 밤, 불은 꺼져도 사랑의 온기가 남아 빛처럼 비추며 따뜻함이 집에 감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여자는 집의 냄새를 맡으며 평온과 고요에 안도한다. 세월이 흐른 만큼 편안함이 더해져 온화한 표정마저 닮아가는 두 사람은 침실에서 작은 조명을 켜고 손을 잡은 채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곤 한다.
여자와 남자는 머리카락이 희끗한 중년이 되었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건강하게 자라 성년을 앞두고 있다. 오늘은 평소보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자가 말한다. 그동안 여자를 닮아 능력이 없는 줄 알았던 딸에게 뒤늦게 보이는 징후들이 걱정스러웠다. 사실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단순히 공감 능력이 좋거나 실천력이 강한 것일 거라 넘기곤 했다. 그런데 선한 마법을 쓸 줄 알도록 선택받았기에, 세상에 빛이 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꼭 넘어야만 하는 시련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고,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오래도록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지만 시련을 극복하면 능력을 완전하게 갖추고 빛이 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삶은 존경받는 아름다운 삶이지만 외롭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빛이 밝으면 어둠도 깊은 법이니까. 달의 리면처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