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간만에 양귀자의 소설을 읽었다. '원미동 사람들'을 필두로 '나는 소망한다, 나에게 금지된 것을' 등 저자 작품중에서 나름 유명한 작품을 주로 20대 또는 30대 초반에 주로 읽었었다. 그 이후로 저자의 소설을 접한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 MZ세대(특히, 여성)를 중심으로 출간된지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모순'이라는 소설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알고싶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고 심플하게 느껴졌지만, 각 페이지마다 정제된 언어로 저자가 던지는 생각 거리가 많아 오랜간만에 소설을 읽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읽혀 온 이유를 어림잡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되었던 '모순'이라는 소설 제목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어떻게 보면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대로 가장 적확한 제목일수도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안진진(이름부터 모순의 느낌이 드는)이라는 20대의 여주인공이 섬세하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생활고로 억척스러움만 남은 엄마, 조직 폭력배의 삶을 동경하고 여자 문제로 감방에까지 가게 된 남동생, 우아하면서도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엄마의 쌍둥이 동생 이모 등을 주요 가족관계로 하여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두 남자(철저히 현실적이며 계획적인 남자와 낭만적이고 사랑스럽지만 현실의 삶은 녹록치 않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여주인공이 느낀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소설은 추리소설 처럼 스토리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여주인공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의 변화에 주목하여 읽어야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순'이라는 제목처럼 의도적으로 극과극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먼저, 주인공의 엄마는 폭력적이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시장에서 양말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활력이 강한, 억척인 사람으로 그려지는 반면, 엄마의 쌍둥이 여동생(주인공의 이모)은 무난하지만 경제적으로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 모든 면에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여동생의 삶이 훨씬 행복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오히려 저자는 여동생이너무나도 평범하면서도 무난한 삶 등의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삶이란 생각 이상으로 모순투성이임을 얘기하고 있다.
또한, 여주인공이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두 남자의 상황 및 성격도 상대적으로 그려진다. 여주인공이 본인 및 가정의 허물을 포함하여 대부분을 얘기할 수 있는 남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으며 밝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향후 연애, 결혼 등 인생의 주요사항을 면밀한 계획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남자는 이와 정반대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으며, 수동적, 즉흥적이나 감정에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여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어 공감되는 후자의 남자와 사랑을 느끼고, "단조로운 삶을 통한 단조로운 행복" 보다는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등의 자신의 생각처럼 후자의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지만, 이모의 자살을 계기로 결국 자신이 처한 환경 등과 정반대인 남자와 결혼을 택한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삶은 발전할 것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하면서..
한편, 이 소설의 백미는 수시로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던지는 화두와 같은 문장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결혼은 여자에겐 이십년 징역이고, 남자에겐 평생 집행유예 같은 것..",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등등 마음에 와 닿은 문장들이 많았다.
저자는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풍요와 빈곤 등 하나의 개념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반대어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모순"을 통해 대답할려고 노력했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으면서 폭넓은 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까지 들여다 봄으로써 해석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 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