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여년전부터 좋아했던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가 추천한 책이기도 하고, 이번 달 사정상 분량이 적은 책을 읽어야 했기도 해서 읽어보았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맑은 마음에 무언가 뭉클하거나 혹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맡겨진 소녀이지만, 책의 내용을 다 알고나니 책의 실제 제목은 소녀를 맡아준 부부인 거 같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24~25쪽,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이제 옷 입자." 아주머니가 말한다. "옷이 없는데요." "그렇겠네." 아주머니가 잠시 말을 멈춘다. "당장은 우리 집에 있는 낡은 옷으로 되려나? "전 상관없어요." "착하기도 하지."
26~27쪽, "나랑 우물에 가보자." 아주머니가 말한다. "지금요?" "지금은 안 되니?" 이 말을 하는 아주머니의 말투 때문에 왠지 우리가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거 비밀이에요?" "뭐?"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에요?" 아주머니가 나를 둘러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한다. 나는 여태까지 아주머니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아주머니의 눈은 짙은 파란색인데 군데군데 다른 파란색이 섞여 있다. "이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네, 이 집에 비밀은 없어요."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얻 돼."
30쪽,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6쪽,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우리는 매트리스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서 햇볕이 내려쬐는 마당으로 나간다. 개가 다가와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뒷다리를 들려고 한다.
63쪽, "...옷장에 아직도 그 애 옷이 걸려 있어?" ..."그 애 옷이요?" "그래" 밀드러드 아주머니가 말한다. "개 방에서 잔다고 했으니 당연히 알겠지, 못 봤니?" "어, 제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원래 아주머니가 갖고 있던 옷을 입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 고리에 가서 다 새로 샀어요." ..."그렇겠지, 하긴 그동안은 죽은 애 옷을 입고 지냈으니." "네?" ..."그게 두 사람이 널 만나기 위해 굴려야 했던 바윗돌이었나 보지. 액 그 집 늙은 사냥개를 따라서 거름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빠져 죽었지 뭐니?"
64쪽, "사람들 말로는 존이 총을 꺼내서 개를 밭으로 끌고 갔지만 차마 못 쐈다지? 마음 약한 바보라니까."
65쪽, "너도 알겠지만, 두 사람 다 하룻밤 만에 하얗게 샜지 뭐니"
68쪽, "뭐라고 하던데?" "아주머니랑 아저씨한테 아들이 있었는데 개를 따라 거름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죽었다고, 제가 일요일 미사에 입고 간 옷이 그 애의 옷이라고 했어요."
69쪽,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75쪽,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 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79쪽,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85쪽, 나는 그 남자애의 재킷을 걸친 다음 양동이를 들고 밭을 따라 걸어간다. 발자국을 따라서 소 떼를 지나치고 전기 울타리를 지나는 길을 다 알기에, 이제 우물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
86쪽, 하지만 양동이를 들어 올리려고 남은 한 손을 마저 뻗었을 때 내 손과 똑같은 손이 물에서 불쑥 나오는 듯하더니 나를 물속으로 끌어 당긴다.
88쪽,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 생각하면 정말."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백 번이야." "그래도 -" "아무 일도 없었고 애도 멀쩡해. 그럼 된 거야."
93쪽, 그 때 내가 재채기를 하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푼다. "감기 걸렸니?" 엄마가 말한다. "아니요." 내가 쉰 목소리로 말한다. "안 걸렸다고?"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무슨 말이니?" "감기 안 걸렸다고요." 내가 말한다. "그렇구나." 엄마가 나를 다시 의미심장하게 보며 말한다. "지난 며칠 동안 누워 있었어."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오한이 들었나 봐." "네." 아빠가 말한다. "제대로 돌보질 못하시는군요? 본인도 아시잖아요."
97쪽,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을 데려간다.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딱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차려입은 옷을 통해 전달되는 아저씨의 열기가 느껴진다. 내가 마침내 눈을 뜨고 아저씨의 어깨 너머를 보자 아빠가 보인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없이 굳세게 다가온다.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