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이끄는 민족은 끊임없이 바뀌고, 그에 따라 세계사는 요동친다. 그럼 세계를 움직여온 민족은 어떤 이들이며, 그들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 질문은 ‘무엇이 역사를 바꿔왔는가’와도 상통하는 말이다. 오랫동안 세계사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기아에 대한 공포와 풍요로운 삶을 향한 욕구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질서를 변화시켜온 민족은 대부분 유목민족 혹은 상업민족이었다. 그들은 원래 약소민족이었지만, 여러 민족을 흡수·동화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분열과 약화의 길을 걸었다. 혼란스러운 현대사회의 정세를 파악하고, 나아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의 태생과 역사 및 행동 원리를 이해하고, 서양사와는 또 다른 관점으로 세계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등의 시민혁명도 유럽 우위의 상황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데 큰 몫을 했다. 평민층의 참여로 사회가 한층 더 성장하게 된 것이다. 혁명으로 새롭게 탄생 한 국가, 즉 국민국가(nation state)에는 당연히 ‘국민’이 필요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혈연집단인 부족의 뒷배가 없는 평민층이 국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귀속 집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민족의 개념이 생겨났다.
언뜻 보면 식량을 생산했던 농경민족의 사회가 더 안정됐을 것 같지만, 오히려 부족한 생산량 때문에 식량 쟁탈전이 일어나 사회가 불안정했다. ‘곡물의 순환’을 생계 수단으로 삼은 상업민족 역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식량이 부족하거나 편중되어 경쟁이 확대되고 전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강한 부족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말’이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유목민족이 전쟁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초원의 딱딱한 풀을 먹는 말은 풀을 자르는 앞니와 씹어서 으깨는 어금니를 가지고 있다. 스키타이인은 그 사이에 있는 넓은 공간에 뼛조각(나중에는 금속 조각이나 재갈을 이용)을 걸치고 고삐를 걸어 말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다.
이 기술이 서쪽으로는 헝가리 초원에 전해졌고, 동쪽으로는 몽골고원, 만주 평원에까지 전파되어 유목민족의 역사를 바꿨다. 생활과 밀착된 기술에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말을 사육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 기마민족으로 성장할 준비를 한 셈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 활약한 웅변가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설령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법의 기원은 12표법이다.” 라틴족은 권력자끼리 연합하여 지배하는 형태를 거부하고, 법률을 통해 전례와 관행의 벽을 깨부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서민의 힘이 라틴족 발흥의 원천이었다.
이 중에서 아랍인이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여 세계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사건이 경제도시 다마스쿠스를 대상으로 벌인 ‘지하드(성전)’라는 이름의 정복 전쟁이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한 세속적 전쟁이었다.
전쟁 상대는 거대한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힘든 싸움을 예상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병들어 있었고, 그들은 손쉽게 다마스쿠스를 함락했다. 아랍 유목민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막대한 전리품을 나눠가지는 동시에 경제도시를 지배하게 되었다. 전리품의 5분의 1은 교단이 가졌지만, 나머지는 원정에 참가한 부족의 몫이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아랍 유목민들은 ‘정복 사업’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부족 간의 결합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났다.
상업민족과 탄탄한 관계를 맺어온 몽골족, 튀르크족은 몽골고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활동하던 민족에서 세계사를 바꾼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말의 이용 → 기마 기술의 체계화 → 기마 군단의 출현 → 상업민족과의 협력’이라는 4단계를 거치면서 강대해졌다.
명은 재정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거뒀고, 파탄에 빠진 농민들이 반란(이자성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각지를 전전한 뒤 1644년 베이징으로 침입했다. 궁전을 점거당한 마지막 황제가 자살하면서 명은 멸망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만주족에게 찾아왔다.
만리장성의 산하이관에서 만주군과 대치 중이었던 명의 장군 오삼계가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만주족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만주군은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고 베이징의 궁전을 되찾은 뒤, 그대로 베이징에 머무르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때 만주족의 인구는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정도로 중국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이후에 그들이 제국을 건설한 것은 연이은 행운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항해를 떠난 선원들이 아프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과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있는 혼곶을 발견하면서,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이 하나로 이 어지는 해양 세계가 완성되었다. 전 지구를 잇는 대규모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민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이 한랭한 기후로 식량이 부족한 북유럽에서 벗어나 해결책을 찾아 나선 가난한 바이킹, 즉 노르만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