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로 유명한 작가 김훈의 출판작으로서 단편의 산문집을 하나로 엮은 모음집과 같은 책이다.
무려 45편의 각기 다른 주제와 소재의 산문이지만, 그 속에서 작가의 특징인 간결한 문장 구성 및 날카로운 상황 인식 및 전달 능력이 매우 놀랍다.
"일산 호수공원의 설날"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다소 가벼운 소재의 산문들도 그 느낌과 그것을 풀어내는 작가의 탁월한 감각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세원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와 같이 다소 정치적이고 민감할 수 있는 어려운 주제를 작가 특유의 담담함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매우 좋았다.
특히 사회적으로 관심도가 높은 주제를 다룰 때 있어서, 우리 사회의 복잡성과 또 세월의 흐름에 따른 의식의 변화 및 기준의 다양함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담론을 거부감 없이 어찌보면 제 3자의 관점에서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실로 배울만 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먼 발치에서 이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라는 표현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작가의 시작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표명하고 있다.
아쉽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또는 지키기 힘들어져 가는 언론의 역할과 사회적인 인식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하고 싶다.
방송이나 신문사의 입장에 따라서 정부 정책과 사회문제를 다룰 때 있어서 자칫 극단으로 치닫고 대다수 국민들의 신임과 공감을 얻는 언로가 날로 줄어들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허송세월"을 통한 김훈의 통찰력은 분명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작가는 개인적인 감상이나 사회상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난세의 책 읽기"라는 주제에서는 작금의 시대상에 대한 소회를 나눔과 아울러, 책 읽기가 주는 의미와 독자의 책 선택에 실질적인 가이드가 될 수 있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에 대한 모음집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를 넘어서서 그의 일상에 일정부분 함께 하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키는 묘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일상 생활에 대한 수필 형식의 글이 많다보니 작가와 개인적으로 동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 것도 이 도서를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즐거움 이었다.
가령 "혼밥, 혼술"이라는 주제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홀로 있을때와 그러한 중에 어떤 행동을 할 때 느껴지는 평화로움, 약간의 자기연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상념들을 떠올리며, 그것과 작가의 그것 들과의 차이점을 비교해보며 읽히는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요즘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신문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MZ 세대" 라던가, 세대간 갈등 등의 문제가 나올 때마다 함께 제시되는 솔루션은 아마도 "경청"이 아닐까 싶다.
머릿속으로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경청의 중요성 이지만, 실제 생활에서 또는 무의식적으로 경청하지 못하고 얼른 내 말을 쏟아내 버리는 경우가 모두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작가도 이러한 점을 느꼈는지, 이러한 아이러니를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이라는 짧막한 13글자 속에 함축해 내었다.
이 글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는 격한 공감을 했다.
이처럼 간결한 속에 본질을 예리하게 본떠내는 이러한 필력이야 말로 김훈 작가를 대표하는 독특한 특성이 아닐까 생각하여 보았다.
그렇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그 말을 들을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해야 하고, 또한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말투나 톤 등 그 형식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말하는것이 어렵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듣는 것에 비하면 말하기는 오히려 쉬운 것이 아닐까 하고 셍각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내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쏟아내는 말을 듣는 것인데 왜 그것이 더욱 힘든 것일까.
왜 그러한 순간을 참아내지 못하고, 내 말을 시작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한 점에서 작가는 듣기의 "괴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내가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생각을 가까이서 따라갈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하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