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거북이가 천 년에 한 번씩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오는 날, 망망대해를 떠돌던 구멍 뚫린 널빤지 구멍에 머리를 끼워 넣는 것만큼이나
인간 몸 받기 어렵다는 붓다의 말씀은 이 삶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도 귀한 인간의 삶을 받은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잠깐 다니러 온 이 존재여행을 얼마나 행복하고 하고 있을까요?
이 책에서 존재여행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들이 무엇일지 함께 탐구하고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땅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을 싹틔웁니다. 물은 스스로 흐르면서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불은 생명을 따뜻하게 덥혀 보호하거나 풍성하게 만들고, 나아가 태워서 부드러운 재로 만듭니다.
이 특징들은 모두 원래의 것을 변형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허공은 어떤 현상이든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놓아두고 허용하고 비추어 줍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도로에 나가보면 수많은 차들이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고,
공항에는 떠나는 이들로 인해 붐비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삶을 대변해 주는 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날마다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가르침을 받습니다.
평생교육이라고 해서 날마다 눈을 뜨고 나면 새로운 이론과 가르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부터 고령화 사회 대비까지, 우린가 배워야 할 것은 넘쳐납니다. 게다가 다른 이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날마다
불안과 염려에 시달리면서 애쓰며 배우고 있습니다.
멈춤이란 자신의 선험적 견해의 작동을 멈추고, 밀당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나의 것'이라는 내 생각, 내 가치, 나의 개념등을 대상에 덧입히지 않는 것이지요
오쇼 라즈니쉬는 '장비꽃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보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기억, 경험, 듣고, 보고 알고 있는 것들을 텅 비워야' 대상의 현재 실제하는 모습을 느끼고 깊이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대상을 알기 위해선 자신의 선험적인 경험과 생각에 대한 멈춤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오랫동안 바라보는 '머무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머무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만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번 생에 처음 본 것처럼, 장미와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때 '장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바라보는 존재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멈춤과 머뭃을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고통을 경험하고 계시다면 실제로 한 번 실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나의 경험과 생각, 가치 판단과 선호로 인해서 고통이 더 배가되지는 안았는지요?
고통 속에 머물면서 고통을 깉이 관찰할 때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기고, 배움과 통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상에 머물면서 관찰하여 알게 될수록 깊은 이해와 지혜가 생겨 더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용이 깊어지면 편안하고 평온함, 평화 등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내가 비추는 것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되면 자신도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막 도착했을 때 신생아인 우리를 바라보며 경이와 환희에 가득했던 어머니와 아버지, 친척과 지인들의
따뜻한 눈길과 손길 같은 아무 조건 없는 환영과 사랑은 우리를 너그럽고 이해심 있는 수용적인 성품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해와 수용과 자애로움이 있는 마음에는 분노와 악의가 자리 잡지 못합니다.
수행의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일상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깨어 있다면 재미있고 환희로운 존재여행이 될 것입니다.
어느 이른 봄, 남도의 꽃향기가 전파를 타고 제가 있는 북쪽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남도로 내려가 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인이 보내준 스마트폰 속 사진으로 꽃을 볼 수 있었지요.
저는 사진 속 꽃을 바라본 후 눈을 감고 꽃향기와 바람과 햇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제 자신이 그 매화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달콤하고 진한 매화 향기가 제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기는 제 가슴을 설레게 하고, 얼굴엔 미소를 짓게 하여, 종일 봄을 누리를 기쁨과 행복을 느끼면서 지낸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면 잠시 눈을 감고 상상으로 그 풍경을 자신의 몸으로 초대해 보세요.
아름다운 풍경에서 행복감을 누릴 수 있으면, 이제 가까운 이부터 알고 있는 이들, 그리고 미워하는 이들까지도
상상으로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초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넓어지고 유쾌해지고 더 기뻐질 것입니다.
지구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누리는 것이 집착하는 고통을 낳지 않는 다면 존재여행의 목적인 진정한 열반을 향해 가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가던 깅이 아닌 다른길로 가 보거나 늘 걷는 방식이 아닌 다르게 걸어 보기, 콧노래나 허밍을 하면서
걸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다른 경험으로 마음도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물건들, 가방이나 신발,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도 창조적으로 변형해서 사용하거나 요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비와 익숙함에 길들여진 인식을 환경 보존과 생태적으로, 낯설고 창조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도
작고 기쁜 수행입니다. 이외에 습관적으로 살아 왔던 방식의 틀을 깨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중 하나를 시도해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보세요.
시 한 편, 한 마디의 말, 노래 한 곡, 흘러가는 구름 한 자락, 무심코 눈에 띤 잡지에 실린 사진이나 단어, 아니면
누군가의 아무 대가 없는 미소 등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새롭게 존재 하도록 깨우는 전령사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뜻밖의 발견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려는 우주의 사랑 고백이나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붓다는 누군가로부터 불쾌한 말을 들을 때 어떻게 자신을 단련하고 수련하는지에 대해 '맛지마니까야" '까까쭈빠마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그대들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불쾌한 말에" 영향 받지 않을 것이며,
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불쾌한 말을 한는] 그의 이익을 위하여 증오심 없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자비로움에 머물 것이다.
우리는 자애로 물든 마음으로 그를 가득 채우면서 머물리라, 그 사랑에서부터 시작하여 증오 없이, 악의 없이, 무한하고, 광활하고, 무량한 자애의 마음으로 온 세상을 물들여 가득 채우면서 머물리라."
이 구절은 제게 지금이 친절한 사랑과 연민이 필요한 순간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가득 채워 저의 약점과 실수, 한계를 받아 들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실수와 약점이 자원이 되도록, 성장과 배움으로 가져가야 함을 다시 새기게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 많은 이들로부터 습관적으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 왔기 때문에 바깥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언제 까지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대신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스스로 보살필 수는 있지요.
"나에게 필요한 사랑을 스스로 주기", 이것이 자기 자애와 자기 연민입니다.
붓다께서 가르친 호흡 수행은 스스로 숨을 쉬면서 자신의 호흡이 긴지 짧은지, 거친지 부드러운지, 큰지 미세한지 등의
질적인 감각을 알아차리고, 온몸으로 숨 쉬는 것을 꾸;뚫어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그중에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고 내쉬는" 수행이 있습니다. 마치 피부나 세포로 호흡을 하는 생물처럼 머리 끝
정수리에서부터 발까락 끝까지, 온몸으로 숨 쉬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숨을 깊이 자각하다 보면 우리 몸 전체의 세포들 속으로 생기와 청기가 들어오고, 턱기와 사기들이 빠져나가 건강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온몸에 깃들 분안이나 걱정, 고통이나 통증, 불편함이 있다면 숨과 함께 밖으로 보냅니다.
부정적인 감정의 손님들이 찾아올 때 호흡이라는 선물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들에게 불편하고 힘든 과제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는 지혜롭고 훌륭한 도반인 호흡 수행으로 이들을 잘 맞이하고 보낼 수 있습니다.
천천히 하는 깊고 긴 호흡은 우리 삶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려 주는 스승입니다.
요즘은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많지만,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맨발로 걸어 다녔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시력이 좋아 안경을 많이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새벽에 맨발로 이슬을 밟아서 그렇답니다.
차임에 일어나 맨발로 대지와 인사하고 어머니 지구의 품을 마음껏 누비며 받는 선물 덕분이라고 여기는 것이겠지요.
맨발로 걷는 행위는 인간과 지구 사이에 어떤 것도 두지 않게 하는 친밀감 외에 경외와 존경을 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걷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을 이동하여 세상으로 나아가거나,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소마 전체가 동참하는 움직임입니다.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소마 전체가 동참하는 움직임입니다.
걷기 위해선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이 협응을 해야 하지요, 잘 걷는 것만으로도 치매를 예방하거나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애기입니다.
둔 눈은 약간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가슴을 펴고, 드 무릎에 살짝살짝 반동을 느끼면서, 양 엄지발가락에 의식들 두고,
발바닥 전체가 땅과 닿는 접촉면을 알아차리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딩어 봅니다.
몸의 균형이 어딘가로 쏠려 있지는 않은지, 발바닥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은 곳은 없는지, 과도하게 힘을 주는
부위는 없는지 알아차리면서 걷습니다. 들숨에 몇 걸음을 내디디고 날숨에 몇 걸음을 내딛는지 알아차리면서 걸어
보시길 바랍니다. 고요한 명상 상태에 들어 평온함과 만족함이 느껴질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의 걸음이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예술과 명상이 될 수 있음을 그의 시에서 전합니다.
"매 순간 평화를 보듬고 평화 위를 걸어라.
매순간 행복을 보듬고 행복 위를 걸어라.
매 때마다 신선한 산들바람을 안고 걸어라.
매 때마다 꽃이 만개한 모습을 만들어리.
너의 발끔으로 대지에 입 맞춰라.
너의 사랑과 행복을 대지에 건네라.
대지는 안전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안정적으로 느낄 때"
붓다는 몸과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명상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무아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나아간다."는 자의식을 버리고 걷는 것, 단지 물과 바람과 불과 땅의 요소가 조화롭게 작용하는 유기적인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걷는 것은 그 자체로 무아의 체득을 위한 지혜 수행입니다.
해유와 해탈, 기쁨이 온 존재로 스미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