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릴 적 할머니는 말끝마다 "어이구 내 강아지, 밥 먹었어?"라는 상투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사람의 아이에게 왜 강아지라고 하는 건지, 밥은 또 왜 그렇게 챙기는 건지 궁금했다. 나중에야 그 말의 함의를 알아챘다. 옛날엔 아이가 태어났다고 모두 어른이 된다는 보장이 없을 만큼 위생 환경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일이 년은 무사히 살아야 그제야 사람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늦은 출생 신고도 그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열악한 위생 탓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목숨을 노리는 괴수가 있었는데 어른들이 아이를 '우리 똥강아지', '돼지', '못난이'라고 부르면 형편없는 아이로 착각을 하고는 목숨을 빼앗아가지 않는다고 믿어서라고도 했다. 뭘로 불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게 중요했던 시절이었고 그 아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자기가 어릴 적부터 들었던 그런 이상한 아명들을 자기 손자에게 붙이는 것이었다.
아이가 귀한 시절이니 노인들이 자기 아이에게 그런 험한 아명을 가져다 붙이면 요즘 젊은 엄마들은 미신이라며 질색하겠지만 그게 다 노인들의 혜안이라고 여겨주면 어떨까 싶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만 있다면 그보다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저녁을 먹고 나면 어둑해진다. 따가운 여름 햇살을 피해 슬슬 산책을 나가니 동네 골목 곳곳에 목줄을 한 강아지와 견주들도 산책을 나선다. 하나도 비슷한 강아지들이 없다. 갓난 아이만 한 강아지부터 덩치가 초등학생만 한 개까지, 서로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잔뜩 긴장하며 자기 보다 크고 거칠게 생긴 개를 유심히 지켜보는 작은 개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개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길거리에서 재롱을 부리는 강아지를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지만 간혹 일을 본 개의 뒤처리도 하지 않고 내빼는 견주나, 목줄을 너무 길게 뽑아서 통행에 방해가 되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견주를 보면 '개만도 못한...' 이런 마음의 소리도 나온다. 모두가 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전에 살던 집 근처에 펫숍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각자의 작은 공간에 갇혀 팔려가기를 기다리며 서로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개와 고양이들. 애완용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 엄마는 자신의 새끼들이 저렇게 진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개중엔 기운이 하나도 없는지 줄곧 누워만 있는 강아지를 보면 어디 아픈가 싶어 한참 들여다 보기도 했지만 강아지 입장에선 그 조차도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아 자리를 비켜주었다.
강아지 이름이 나또라고 했다. 황금색 털을 가진 강아지라 혹시 일본 된장을 떠올려서 붙인 이름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유기견에 비슷하게 거리에서 주워온 강아지. 주인은 여고생 수주, 그녀는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어릴 적 덴마크로 입양을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할아버지나 부모를 어릴 적에 잃은 수주나 자신을 낳아준 엄마가 누군지 모르는 나또나 비슷한 가족사를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가는 도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량을 잘못 타는 바람에 나또의 방랑은 시작된다. 차례로 만나게 되는 사람과 다른 동물들과의 에피소드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과연 어린 강아지가 주인을 찾아 부산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소설은 나또라는 수컷 강아지의 입장과 시선에서 서술한다. 아주 드물게 인간의 개입이 있긴 하지만 부수적이다. 거의 대부분은 나또와 다른 동물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처지에 입각해 전달된다. 그들의 시선에 인간의 존재와 행동은 어떠 의미였을까. 인간의 언어를 무리 없이 알아듣고 심지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나또를 보면 '서당개 삼 년에....'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려동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재롱을 부리면 맛있는 걸 얻어 먹을 수 있다는 반복적인 습관을 인간은 자신들을 조련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이 모든 인간의 행위를 꿰뚫어보는 것 같은 나또의 인식은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