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 법정 스님은 전라남도 해남에서 1932년 10월 9일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다가 대학 재학 중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다.1954년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났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뒤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다음 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했으며,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뭄래사시고 정진했다. 그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다가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는다.서울 봉은사에서 운허 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1975년 본래의 수행승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제자들에게조차 거처를 알리지 않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 문명의 도구가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왔다.그리고 2010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나셨다.대표 산문집 <무소유>는 그 단어가 단순히 국어사전에 있는 사전적 개념을 넘어 '무소유 정신'이라는 의미로 현대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홀로 사는 즐거움> <아름다운 마무리> 등의 산문집과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사람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다.
『법정스님이 세상에 남긴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는 『낡은 옷을 벗어라』 출간 이후 ‘법정스님이 불교경전을 번역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달라’는 애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사)맑고 향기롭게와 협의해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해 엮어냈다. 13편의 창작 불교설화는 1960년대 초 《불교신문》에 법정스님이 게재한 글이며, 김계윤 작가의 그림을 더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법정스님이 세상에 남긴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에는 법정스님이 초기 경전번역을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세상에 전할까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다.
첫 번째 설화 「어진사슴」은 『불설구색록경(佛說九色鹿經)』 이야기가 들어 있다.먼 옛날 인도 갠지스 강가에 아홉 가지 털빛을 가진 사슴 한 마리와 까마귀가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봄날 강기슭에서 목을 축이던 중 한 사나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떠내려 오자 가엾은 생각이 들어 구해준다.사나이는 자신을 구해 준 사슴에게 은혜를 갚으려 하지만 사슴은 ‘은혜를 갚아주려거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나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이후 나라에서 왕비가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앓고 있는 이유가 사슴의 털로 깔개를 만들고 뿔로 부채자루를 만들고 싶어한다. 은혜를 잊은 사나이는 큰 상을 내리겠다는 영에 그곳을 알려주게 되어 사슴은 잡히게 되었고, 사슴은 죽기 전에 자신의 은혜를 배신한 사나이를 고발한다.임금은 사슴을 살려주고 많은 사슴들이 아홉 가지 털빛이 있는 사슴에게 모여들어 평화롭게 산다. 이 사슴은 부처님이 보살행을 닦을 때의 모습이며 까마귀는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였다.두 번째 설화 「조용한 사람들」은 불교경전 『비나야파승사(毘奈耶破僧事)』를 이야기로 풀어냈다. 어느 달밝은 보름 밤 많은 신하들이 어떻게 하면 즐거운 날을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여기저기서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한 사람의 신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그 이유를 묻자 신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큰 동산에 부처님이 와 계시는데 그곳에 가 주셨으면 한다’고 청했다. 신하를 신망한 임...금은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숲에 들어가 천이백오십인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고 있는 부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오오, 부처님이시여!. 제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 제 명령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복종하고 있는 군대라 할지라도 단 한순간만이라도 이와 같이 조용히 있게 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이토록 조용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부처님은 조용히 대답하셨다. “임금님은 사람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는 하지 않고 사람들의 겉모양만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임금님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보름달처럼 조용하면서도 밝은 빛이 번지고 있었다.열두 번째 설화 「땅거미」는 『본생담(本生譚)』 이야기를 근거로 원숭이 얼굴과 엉덩이가 빨간 사연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악마가 땅거미에게 시달린 이야기를 전해들은 원숭이가 땅거미는 없다고 단언한다.그러다 말 도둑이 도망치려 원숭이 꼬리를 밧줄로 착각해 죽기살기로 붙잡게 되고 빼내려던 원숭이는 땅거미로 착각해 벗어나려다가 꼬리가 빠지고 만다. 그 일로 원숭이의 얼굴과 엉덩이(밑)가 빨개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열세 번째 설화 「구도자」는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불교소재를 가져와 창작한 설화다. 여기에는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에게 법을 구하기 위해 어깨를 자른 혜가대사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내고 있다. 법정스님은 글 후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이것은 중국 선종의 제2조인 혜가가 초조인 달마를 찾아가 설중단비(雪中斷臂)로써 구도한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온 기록과는 얼마쯤 다른 점이 있을 줄 압니다. 그것은 하늘도 저렇게 높아버린 계절이고 해서 상상의 나래를 가볍게 펼쳐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이 밖에도 『법정스님이 세상에 남긴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에는 불교경전에 근거한 주옥같은 설화인 「겁쟁이들」 「저승의 선물」 「그림자」 「장수왕」 「봄길에서」 「봄 안개 같은」 「모래성」 「연둣빛 미소」 「어떤 도둑」 등 13편의 불교설화가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