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 한동안 위인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생겼었다. 그리고 현대정치에서 참 인물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과거 우리 역사에서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세종이 떠올랐다. 세종에 대해선 어릴때 역사책에서 배운게 전부라 책을 통해서 다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본 서적을 선택하였고, 세종과 더불어 존경받는 정조에 대해서도 같이 알수 있는 책이었다.
세종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아서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밤새워 글을 읽느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자로 있을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한번은 몇달동안 앓아누워 있으면서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다. 태종이 걱정하여 책을 다 치우게 하고 한가지만 남겨놓았는데, 그 책을 날마다 읽고 외웠다. 즉위한 이후로는 날마다 밤 4시경에 일어나서 옷을 입고 이른 새벽에 조회를 받은 다음 정사를 살피고 윤대를 하고 경연에 나갔다.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또한 처음으로 집현전을 설치하여 문학에 빼어난 선비들을 뽑아서 자문에 대비하도록 했다. 경서와 역사서 읽기를 하나의 즐거움으로 여겨 싫어함이 없었다. 쉽게 얻어보기 어려운 옛날책이나 글을 대하면 잊지 못해 했으며, 많은 서적을 고찰하고 응용했다. 문무 정사가 두루 잘 시행되어 예악 문화가 다시 흥성했다. 각종 악기와 천문역서의 방법 또한 예전에는 제대로 몰랐는데 세종이 모두 밝혀냈던 것이다. 여러 친척들과 화목했고, 두 형과는 각별히 우애하여 사람들이 그 사이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신하들에 대해서는 예의에 맞게 대하고 간하는 말은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였다. 사대관계는 성심으로, 교린의 관계는 믿음으로 시행했다. 사리를 환히 꿰뚫어 남방 북방과 다 사이좋게 만들었으며 온 나라가 태평했다. 30여년 동안 백성들이 삶을 즐길수 있게 되었다. 거룩한 덕이 워낙 높고 높아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므로 당시 세상에서 '해동 요순'이라고 일컬었다. 말년에 불교 문제를 가지고 말을 듣기도 했으나 향을 피우고 예불을 한 적은 없었다. 세종은 지중추원사 정인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앞 시대의 잘 다스려지고 잘못 다스려졌던 경위를 살펴야 할 것이요, 그 경위를 알려면 오직 역사기록을 읽어야 할 것이다. 주 나라 이래로 대대로 역사서가 있는데 책이 방대하여 두루 고찰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근래에 송대 학자가 편찬한 자경편을 읽어보니 가언, 선행을 절로 나누어 종류별로 편찬하였는데 간명하고 긴요하다. 옛날에 책을 만든 이들은 보기에 좋도록 했던 것을 알수 있었다. 실로 누구나 학문에 있어 모든 책을 두루 읽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만기를 보살펴야 ㅇ하는 임금의 처지에서는 어느 겨를에 다 읽을수 있겠는가. 경이 역사문헌을 두루 참고, 열람해서 착하고 악한일로 권면, 징계가 될 만한 내용을 뽑아서 편찬하여 한 부의 책을 만들어 읽기 편리하게 하여 후세의 자손들이 영구히 귀감을 삼을수 있도록 하라. 우리 동방도 나라가 선것이 오래여서 흥폐, 존망의 역사를 또한 몰라서는 안된다. 아울러 모두 지나치게 번다하거나 간소하거나 하지 말아야겠다. 책 이름은 치평요람 이라고 내릴 것이다 " 진양대군(수양대군, 세조) 이유에게 이일을 감독하게 했고 문학하는 선비들을 뽑아 집현전에서 부문별로 책임을 나누어 맡겼다. 병진년에는 세종이 의정부에 교시를 내렸다. "옛날 수렵을 나갔던 것은 강무를 하여 해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니 이는 선왕이 제도로 정한 군국의 중대사였다. 우리 조종 또한 옛 제도를 참작해서 본과 가을로 행하는 강무의 법을 행했으니 자손에게 드리운 교훈이 두루 갖춰진 것이다. 그런데 신진 유생들은 이것이 임금의 놀이행사에 지나지 않는다하여 매번 중지할 것을 청했다. 대신들 중에서도 중지하자고 하는 이가 더러 있다. 지난해에는 강무의 시기를 당해서 내가 마침 병이 있어 몸소 거행할수 없었다. 그래서 장수를 명해 나를 대신하여 행하도록 하려고 했으나. 대신이 논하기를 '병권을 장신에게 주는 것은 의리에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여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