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본 도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차별이 넘쳐나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 속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저자가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던 “의사결정장애”라는 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장애인의 예와 같이 우리 모두 생활
속에서 차별적인 용어를 아무런 의도도 없이 잘 모르고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특권이라는 것이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계단을 쉽게 넘어 갈 수 있을 정도의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않아도 되는 이성애자라는 것 등도 특권이 될 수 있다. 저자는 특권을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이라고 정의한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다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특권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권은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그때 우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특권이
개선되지 않고 유지될 때 차별이 발생한다.
우리 대부분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차별이 있다면 개선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가 다르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저자는 성별, 나이, 직업 등 6가지 차원의 분류와 이에 따른 조합으로 4,096개의
범주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몇 개의 분류기준이 추가되거나 세분화될 경우 분류되는 범주는 천문학적 숫자로 늘어난다.
그래서 사회는 지속적으로 갈등이 존재하고 차별이 개선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국 여성의 경우 남성에 비해 가정에서, 경제생활에서
불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예멘 난민에 대해서는 오히려 차별을 요구하는 입장을 보인다. 이는 선악의 문제를 벗어나, 각자의 입장에서
사건에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책 제목과 같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 간다. 그냥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면
안되는 것일까? 악의없이 던지는 차별적 농담에 웃음짓고, 다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차별적인 언어(ex 흑형, 종특, 김치녀, 병신 등)를
사용하면서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의사결정장애 이런 용어에 대해 차별적인 언어니 사용하지 말라고 문제를
삼는 등 너무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저자는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를
“편견규범이론”이라고 부른다. 유머가 금기된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소수가 약자가 다수 및 강자에게
던지는 유머는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의없이 하는 농담이라도 다수가, 강자가 소수를 약자를 비하하는
웃자는 말에는 죽자고 덤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매우 공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차별의 원인은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이다. 즉 “능력주의”에 따라
능력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는 것은 공정하다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능력이라는 것이 정말 공정한 규칙일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 외모를 지능을 장애를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롤즈가 이야기한 무지의 장막에서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은 어떤 것일까? 입사시험에서 영어시험을 보고,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입사할 수 있다는 기준이 있을 때, 별다른 비판없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그 일 자리가 영어능력을 요하는 자리인가? 단지 영어에 더 접할 기회가 많아 영어에서 점수를
더 잘 받을 수 있는 사회계급을 위한 제도가 아닌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청각장애인 등에 대하여는 원천적으로 기회를 빼앗는 제도가
아닌가 비판한다. 능력주의로 평가해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우대하겠다는(달리 말하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차별하겠다는)
기준을 우리는 살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저자는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도리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의 예라고 말 한다.
저자는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고 이야기 한다. 법이 부당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세상은
충분히 정의롭지 않으며, 이를 개선해야 한다. 정의라는 것은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선량한이라는 형용사는 저자가 대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단어로 생각되고,
무식한, 무지한, 무관심한으로 바꿔 쓰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차별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으로 평등을 보장할 수 없겠지만,
차별에 반대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수립하는 정도의 의미에서라도,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차별금지법 통과를 위해 유권자로서
할 수 있는 실천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