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바이러스, 핵전쟁, 백두산 폭발, 대기근.... 요즘 인기 있는 문화 콘텐츠의 핵심에는 인류의 멸망, 즉 아포칼립스가 있다. 물론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빠진 주인공이 갖은 기지를 동원해 위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러나 주인공 혼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절멸의 위기를 맞는 이야기가 이토록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최근의 특이한 경향이다.
한떄 '아마겟돈'이나 '딥임팩트'처럼 난데없이 날아온 천체가 인간을 위협하는 영화들이 유행하기는 했지만, 이 영화들이 개봉된 시점이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종말의 때인 1999년을 앞둔 시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에 지구 종말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오히려 쉽게 설명된다.
그에 비해 우리가 사는 2024년, 스크린과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멸망의 위기감은 그 근원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기상 이변? 환경파괴?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탱해 오던 민주주의적 붕괴? 아니면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과학기술의 변화 그자체?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위험을 생각하며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하다.
이 책,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는 그 위기가 태양의 온도가 떨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태양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생물에 감염돼 에너지를 서서히 잃어가면서, 온난화 를 걱정하던 지구가 졸지에 빙하기를 맞이할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급격한 온도 변화로 수십년 안에 지구의 동식물이 멸정에 직면하고 그 와중에 인류 또한 멸종할 것이 거의 확실해 진다.
이 상황에서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임무를 떠맡은 사람은 라일랜드와 그레이스다. 원래 그는 실력이 뛰어난 분자생물학자였지만, 외계 생물 추정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생물이 발생하는데 꼭 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소수의견을 주장하다가 동료들의 비웃음을 당하고 학계에서 물러나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SF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외곬의 과학자가 아니다. 외곬은 커녕, 그는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내세우기에는 너무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다. 학계에서 물러난 것도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난 것이라기 보다 지레 의기소침해진 결과다 . 그리고 영웅적인 고집이 없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라일랜드 역시 중학교 과학 교사라는 새로운 직업에 적응해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레이스에게는 태양이 미생물에 감염되어 죽어간다는 사실이 절망적인 한편, 짜릿하고 흥분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온도가 너무 높아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없는 태양 표면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물이 없는 곳에서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따는 그의 가설이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종말을 막기 위해 인류의 모든 자원을 활용할 권한을 부여받은 인물, 스트라트는 바로 이런 가설떄문에 라일랜드 그레이스를 스카우트한다. 뜻밖의 기회를 갖게 된 라일랜드는 과학자로서의 순수한 호기심과 기발한 실험을 통해 태양을 잡아먹는 미생물에 아스트로파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스트로파지의 생애주기와 속성등을 알아내며 본의아니게 인류생존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어 간다.
라일랜드 본인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스트라트의 팀원들은 태양 뿐 아니라 인근 항성계의 다른 항성들도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되었으며 타우세티라는 항성계만이 유일한 예외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타우세티로 과학자들을 보내 그 항성만이 무사한 이유를 조사하고 그정보를 바탕으로 우리 태양계이 아스트로파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 ,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타우세티에 간 과학자들은 지구로 돌아올 수 없다. 선발된 과학자들에게는 이 임무는 자살임무다. 그리고 우리의 겁쟁이 라일랜드는 설령 인류를 구할 수 있다 한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용기가 전혀 없다.
앤디위어는 그런 라일랜드가 영웅적 비장함 때문이 아니라 하찮게까지 보이는 평범한 설령함 떄문에 두인류의 구원이 될 용감한 결단을 내리게 되는 과정을 놀랍도록 실감나게 그려낸다. 태양을 잡아먹는 미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