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라는 개념은 따지고들면 정확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겠으나,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비교적 어려움없이 뜻이 통용되고 있는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물질적, 물리적 대상을 떠나 인간 자체에 까지 적용되면서, 인간의 몸, 정신(영혼), 생각('자연적' 사고작용)까지 가리킬 경우에는 보다 그 해석에 있어 다양한 견해가 갈라져 나올 수 있겠고, 어떤 때에는 여러 사람이 같은 '자연'을 말하는 가운데 전혀 다른 대상과 대상의 작용을 가리키게 되는 현상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이라고 말해지고 있으나, 각각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른 고대 그리스에서의 의미와 근대의 의미를 하이데거에 의거하여 파악해 보고, 다른 사상가(스피노자)의 의미도 살펴 보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을 나타내는 용어로 '퓌시스'가 있다(145쪽). 퓌시스의 의미는 '피어나는 것, 피어남'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존재자 그 자체는 퓌시스, 즉 피어남이기 때문에 존재자 그 자체에는 숨김없음(드러난다는 의미로 생각됨)이 속한다. 그래서 존재자를 그 자체로 파악하는 것은 숨기지 않는 것(숨김으로부터 끄집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146쪽)
존재자 그 자체는 퓌시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존재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주기보다 오히려 침묵하고, 퓌시스(피어나는 것)를 '자연'으로 이해한다.(187쪽). 하이데거로부터 이 퓌시스의 의미에 들어있는 다음 네가지의 고유한 속성을 알 수있다. 첫째, 지속성이다.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갑자기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의 변화와 대비되며, 그 자체로 '서있음'과 존속이라는 이중성 속에서 지속한다. 둘째, 변화와 쇠퇴에 반대되는 방식으로 지속하는 존재자는 모든 부재하는 것과 모든 감소하는 것에 반대되는 현존하는 것이다. 셋째, 불변성과 현존은 자기 자신 안에 그 존재하는 것을 형태가 부여된 것으로서 세우는데, 이렇게 세워진 것은 형태 없는 모든 혼란과 반대된다. 넷째, 지속적인 것은 자신으로부터 현존하고 자신 안에 형태를 지니고 자기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윤곽과 경계를 전개한다.
근대의 '자연'의 의미는 이성에 의해 계획된 것, 정리된 것 그리고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존재자는 더이상 그리스인들이 이해한 의미의 퓌시스가 아니라, 이성이 계산하면서 계획하여 앞서 잡는 것 속에 갇혀서 (이성이) 미리 계산하는 것의 연쇄들 속에 놓여 있다. 이성은 이제 점점 더 합리적이 되고, 모든 존재자는 이성의 제직물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제작물을 작동시킬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은 이 제작물 자체에 의해 무한히 많아지고, 이성의 제작물과 이성적 계산의 제작물이 점점 더 폭주할 수록 '체험'을 향한 외침이 대중 사이에서 더욱더 커지고 많아진다. 제작물과 체험 두가지는 서로를 치솟게 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게다가 예를 들어 기술의 어마어마한 성과인 제작물은 스스로 가장 위대한 '체험'이 되고, 체험은 제작물의 형태를 추가한다.(203-204쪽 인용)
스피노자에게 있어 자연은 전적으로 신의 창조물이다.(이하 '에티카' 제1부 신에대하여 정리 36 요약 인용)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물이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더욱이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신의 창조물은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며, 신들은 인간에게 의무를 지우고 인간에게서 최대로 존경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자연의 그렇게도 많은 유용한 것 사이에 적지 않은 해로은 것들, 곧 폭풍우, 지진, 질병 등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연안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목적과 관련되지 않고) 어떤 영원한 필요성과 최고의 완전성에서 생긴다고.
'자연'은 인간 앞에 펼쳐지고, 지속하는 것이며, 인간의 목적이 아닌 그 자체의 필요성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이용을 위하여 공여되어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인간이 자연을 자기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인간의 필요를 제공해주는 산출의 대상물로서만 인식한다면,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머지않아 이러한 대상으로 인식되고, 종국에 가서는 인간성까지도 산출의 대상물로 간주되는 두려운 결과를 낳을 지도 모른다. 인간성은 제작품으로 전락해서는 안되는 존재인 것이고, 한낱 '체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