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텔레비전에서 빨강머리앤을 만화시리즈로 본 기억이 있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우워' 3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멜로디와 가사가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면 그때 이 작품은 내 어린시절에 상당한 감명과 영향을 끼쳤으리라. 빨강 갈래머리를 하고 얼굴엔 주근깨가 선명한채 하얀 앞치마같은 치마를 입고 바람부는 언덕 위 손을 뻗치며 있던 그 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빨강머리앤 시리즈를 찾아 몽고메리가 처음 집필했던 초본 이후 계속 시리즈를 거듭한 그 완결판까지 다 읽었었다. 앤이 대학을 들어가고 거기에서의 로맨스와 삶, 공부, 가족. 그리고 결혼 후 앤과 길버트의 자녀들의 이야기와 사랑까지 다. 첫 시리즈만큼은 인기 많진 않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흥미로웠다.
깡마른 몸에 빨간 머리와 주근깨가 약점이라고 자타 공인하는 앤은 어릴 때 부모님이 전염병으로 돌아가시고 친척이 없어 이집 저집 맡겨지면서 살다가 최근엔 고아원에 맡겨져서 몇달을 거주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불쌍한 가정사로 인해 어릴 때부터 구박을 받고 고생을 하며 살아야했던 불쌍한 앤. 운좋게 10살 여자아이를 입양한다는 가정에 추천을 받고 기차를 타고 에드워드섬에 도착하게된다. 기차역에서 갖은 행복한 상상을 하며 아저씨를 기다리는 앤은 당연히 남자 아이를 기대했던 매슈 아저씨가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마침내 일이 잘못되어 매슈, 마릴라가 원하는 남자 아이가 아니라 여자 아이가 잘못 온걸 알게 된다.
행복도 잠시, 마릴라 아주머니는 이 소식에 깜짝 놀라 하룻밤만 재우고 당장 아이를 돌려보내라 한다. 그날밤 슬픔에 젖어 밤새 눈물로 밤을 지새운 불쌍한 앤. 마릴라 아주머니는 자초지종이라도 알아야겠다며 주선하신 분께 가지만 거기서도 앤은 또다른 힘든 가정에 보내져 고생할게 눈에 보이니 마음이 약해셔 앤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아이는 커녕 결혼도 안해본 매슈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 남매는 무슨 자신감으로 앤을 키우겠다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앤이 많은 가정과 고난들을 돌고 돌아 이들은 결곡 가족이 될 운명이었으리라. 이 소식을 듣게된 마을 사람들은 걱정과 조롱을 하게 된다. 그에 응답하듯 가는곳마다 사고를 치고(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튀는 행동만을 일삼은 앤. 그래도 매슈와 마릴라는 이런 앤이 있어 집안이 사람 사는곳 같고 활기차고 자신들도 삶의 이유를 발견한듯 앤을 사랑으로 감싸주며 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에서 단연 놓칠 수 없는 거리는 역시 다이아나와의 우정, 그리고 길버트와의 사랑일 것이다. 앤에게 다이아나같은 영혼의 친구가 있었음이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다이애나는 앤과 이야기클럽도 같이 만들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학교도 같이 다니며 앤의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첫 만남은 악연이었지만 늘 선의의 경쟁자로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도전이 되어주었던 친구 길버트. 길버트는 여느 그 또래 남자아이가 그렇듯 앤을 좋아했지만 반대로 괴롭히는걸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앤에게 단단히 오해를 사게 되고 앤과 한동안 아예 말도 하지 않는 사이였지만 서로는 알고 있었다. 앤에게 길버트가, 길버트에게 앤이 없었다면 서로가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거라는걸. 자유로우면서도 지혜롭고 목표가 확실한 앤은 시골의 여느 예쁜 여자 아이들도 붙잡지 못했던 길버트의 마음을 사로잡고, 결국 길버트는 마을 학교 선생님자리를 앤에게 양보하는 희생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마릴라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를 빼놓아선 안된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마릴라아주머니에게 앤은 충격 그 자체였으리라. 앤이 사고칠때마다 수습하는건 마릴라아주머니였지만 아주머니는 왠지 이런 상황들이 싫지가 않고 흥미롭기까지하다. 앤이 없었다면 두분의 삶은 얼마나 지루했을것인가. 늘 앤의 편이었고 앤이 하는 이야기라면 흐뭇하게 들어주었던 아빠같던 존재인 매슈 아저씨. 아저씨가 지병과 갑작스런 충격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겐된건 너무나 슬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앤은 씩씩하게 마릴라 아주머니 곁을 지키고 이제는 자신이 두 분이 하셨던것처럼 보호자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한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흥미로운 앤. 요즘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물을 제작해 상영하고 있으니 그것과 같이 본다면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더 쏠쏠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