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 김훈
최근에 가까이 있는 분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니 이 책이 더욱 와닿는다.
다들 말년의 삶도 지금의 삶과 동일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 역시 그토록 강인한 체력을 가졌었으나 이제는 음주를 절제하고 담배를 끊고, 더 이상 등산을 할 수 없어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는 1948년생으로 겨우 76세에 불과한 나이다. 100세 시대 100세 시대하고 노래를 부르는 현대 사회의 젊은이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76세의 김훈은 덤덤하고 일상적인 문체로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노년의 삶은 단순히 머리가 히끗해져서 염색을 자주해야하는 삶이 아니라 그저 나이가 들어 노년인 삶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걸 말이다.
노후에도 행복을 느끼려면, 늙어가는 나이에 걸맞은 새로운 인생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최근 작고하신 나의 시어머님께서는 향년 70세로 60대까지는 암투병 중에도 골프를 치러 나가시고 해외 여행을 즐기시는 강철 체력의 중년이셨다. 머리는 언제나 염색한 붉은 끼 도는 검은 머리. 언제나처럼 강인한 허벅지 근육과 아이를 키우며 늘상 지친얼굴이던 나와는 다른 쌩쌩한 목소리와 표정. 그래서 어머니의 노년에 대해 막연히 100세 시대의 건강한 노인을 상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투병 중에서도 해외여행을 다니실 정도였으니 자식들이 어머님의 노년을 마냥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는게 핑계 아닌 핑계였으려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머님은 최근 작고하셨다. 70대는 60대와 다르다. 이제는 진짜 노인이 된 것 같다. 60대까지만해도 등산을 했었는데 이제는 못하겠다. 저자 김훈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면서 말이다.
잃어버린 중년의 삶을 위로하듯 어머님은 물건을 마구 사셨다. ‘70대는 하고 싶은 걸 망설이면 안되는 나이래~’하면서 말이다. 그때는 그 말을 단순한 워딩 자체로 이해하려 했으니 갑자기 낭비벽이 드셨나 했었는데 책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더 이상 쌩쌩하지 않은 노년의 삶을 준비없이 맞이하게 된 어머님의 위로였었던 것 같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그것은 속수무책이다.’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마음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의사가 또 말하기를, 늙은이의 병증은 자연적 노화현상과 구분되지 않아서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늙은이의 병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딱히 병이라고 할 것도 없고 병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었는데, 듣기에 편안했다.‘
인상적인 구절 몇 가지. 40대를 앞두고 무릎이 아프기에 정형외과를 가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문득 나보다 앞서 40대를 통과한 남편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제 어디가 안아픈 하루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아픈데보다 안 아픈데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운 게 중년이라며 말이다. 마지막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이게 몸이 늙어간다는 것이구나. 정신은 중고등학교 저 언저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데 몸뚱아리는 속절없이 시간을 지나고 있으니 애석하다가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무릎도 그냥 무릎에 좋은 영양제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비가오려나~ 하면서 가끔 시큰대는 무릎에 따순 손을 얹으며 말이다.
호전적이고 긍정적이셨던 어머님은 뼈가 약해져 지팡이를 짚어야 하셨을 때도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셨고, 재활을 하면 걸을 수 있을거란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반년이 지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급기야 몇 년전에 골프를 치다 삐끗한 게 이제 문제가 되었다며 아무 사고없이 말썽부리기 시작한 골반뼈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가셨는데 거기서는 재활 없이 자유롭게 뛰어 다니고 등산을 즐기고 계시겠지 하는 생각에 그저 조용히 웃는다.
저자처럼 현실적인 노년의 모습을 생각하고 흘러가는 자연의 이치임을 알게 되셨어도 그렇게 활기차게 사셨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제는 어머님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도 저자의 깨달음이 느껴진다. 마냥 얼굴이 늙고 머리가 히끗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게 아니라 청춘의 잔재를 버리고 새로운 노년의 삶을 자연스레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아무도 진짜 노년의 삶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고 알려주지 않았기에 마냥 건강한 100세를 준비하라고만 외쳤기에. 이 책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지 않나 싶다.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