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대표작으로 20세기 기계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진보가 전체주의 사상과 밀착될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기계문명이 극한까지 발달하고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과학의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하여, 마침내 모든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도달하는 비극을 예언한다. 그리고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면서 기계문명의 발달에 도취된 현대인들을 통렬히 공격한다.
‘왜 그것이 금서가 되었나요?’‘낡았기 때문이지. 그것이 주된 이유일세. 이곳에서는 낡은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단 말일세.’‘그것들이 아름다워도 그렇습니까?’‘특히 아름다운 것이면 더욱 그렇지. 아름다움은 매력적이거든. 그런데 우리는 낡은 것에 사람들이 매혹되는 것을 원치 않아.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입장일세.’
‘그러면 내가 가르쳐 주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겠습니다.’그리고는 병원의 안뜰로 향한 창문을 열더니 약상자를 열고 소마 알약을 한 주먹씩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카키색의 군중들은 이 오만한 신성모독에 놀라움과 공포로 말을 잃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미쳤군.’ 버나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속삭였다. ‘저들이 그를 죽일 거야. 죽일 거야.’군중들로부터 요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야만인을 향하여 무서운 인파가 몰려 들었다. 위협적인 물결이었다.
‘그러니까 자내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그래.’‘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긴 침묵이 흘렀다.‘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올더스 헉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기계문명이 극한까지 발달하고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과학의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하여, 마침내 모든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도달하는 비극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작가 헉슬리의 주장은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면서 기계문명의 발달에 도취된 현대인들을 통렬히 공격한다.
이 작품의 풍자적이고 희화적인 표현은 독자가 현대문명의 위기를 흥미롭게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미래의 런던이 배경이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배가 아닌 배양액에 의해 마치 공장에서 기계를 찍어내듯이 태어난다. 태아시절부터 갖가지 약에 의해 계급이 갈라진다. 계급이 좋은 사람은 체격도 좋고 멋지고 계급이 좋지 않은 사람은 체격도 좋지 않고 단순한 일만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이곳은 소마라는 약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다. 이 책에 주요인물은 셋인데 한 명은 버나드, 그리고 한명은 왓슨,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만인 존이다. 버나드는 좋은 계급이지만 체격이 그 계급에 맞지 않아서 항상 불안에 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왓슨은 체격도 좋고 인기도 많지만 이 사회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강렬한 인물인 존...그는 야만인이라고 불린다. 그는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런던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임신하고 금지구역에서 그를 낳아 길렀다.
편안하고 평화로운 안락한 삶을 살 것인지 인내하고 불편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자유의 삶을 살 것인가....마치 매트릭스에서 알약 선택해서 먹는 것 같다. 우리 인간은 늘 고민하고 선택해야하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은 역설적이게 보이는데 누군가에게 그 세계는 진짜 멋진 신세계일 수도 있다. 어떻게 미래 사회를 멋진 신세계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