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제목을 달았으나,
이미 소개된 내용 중에서 사찰만 추려내어 책으로 엮었으니, 시리즈라 하기에는 어색하다.
다만, 대상을 관찰하고 감상하는 저자 특유의 감성은 온전히 살아 있어 볼만하다.
산속에 자리한사찰을 찾은 이들이 느끼는 감흥이라면 대부분 비슷할테지만, 이를 글로 옮기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또다른 일이겠다.
저자의 화려한 수식에 적극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두루 관찰하고 느끼고 즐기는 관점은 존경할만하다고 하겠다.
부석사를 두고 그 잔잔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많은 글들이 있으나, 부석사 들어가는 길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저자의 심미안은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고 하겠다.
최순우선생이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본 아름다움을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바 있지만,
부석사의 또다른 멋은 입구에도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일주문 앞까지는 느릿하고 넉넉히 여유로운 경사로를 지나게 된다.
넓적하고 밝은 색의 돌들을 꾹꾹 박아둬서 넓직하게 보이는 이 길은 포장된 길도 아니고 흙길도 아닌 길이 가지는 깔끔하고도 여유로운 느낌을 한껏 느끼게 한다.
저자는 이 길을 두고 "별스러운 수식이 있을 리 없는 이 부석사 진입로야말로 현대인에게 침묵의 충언과 준엄한 꾸짖음 그리고 포근한 애무의 손길을 던져주는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고 표현하는데,
침묵의 충언이야 알 듯한데, 준엄한 꾸짖음 그리고 포근한 애무의 손길이라고 하는데는 다소의 과한 감정의 흐름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포석이 깔린 길이 준엄한 꾸짖음을 줄 만큼 엄해 보이지는 않고, 애무의 손길이라 할 만큼 보드랍고 유혹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하얀 도포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선비가 단정하게 서있는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라면 오히려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비탈길이 사람의 발길을 느긋하게 잡아놓는다는 표현은 참으로 멋스럽다.
가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이 길에 들어서면 마음속의 번잡함은 절로 내려놓게 되리라.
과하게 넓지도 않고 답답함을 느낄 좁음도 아니니 마음이 절로 풀어지고 바쁜 걸음이 절로 느긋해 지니 딱 중용이라 하고 싶엊인다
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사과밭이 펼쳐져 있다. 펼쳐쳐 있다고 할 만큼 광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법 규모가 있는 사과밭이다.
저자는 자신이 송죽매가 될 수는 없으니, 스스로를 사과나무처럼 가꾸고 싶다고 했다.
그 사과나무는 꽃피는 봄이나, 잎이 무성한 여름보다는 잎 떨어져 알몸을 온전히 드러낸 늦가을 이후가 좋단다.
참으로 그러하다.
봄에 피는 사과꽃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얀 꽃이 필 때면 따스한 볕 아래에 한겨울 눈송이를 한가득 얹었나 싶기도 하다
봄을 지나 여름이 오고, 잎이 무성해 지면 그 왕성한 활력에 감탄하고, 늦여름 지나 열매를 달게 되면 그 잉태력,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서리 내리고 그 잎이 말라 비틀어져 떨어지고 나면, 남은 것은 잎을 달고 열매를 매달았던 가지 뿐.
과수원의 나무야 키가 너무 크지 않게 자르고, 열매를 수확하기 편하도록 가지를 옆으로 벌어지도록 사람이 힘을 들여 모양을 잡아가니 나무 본연의 모습은 아닐진데, 사과나무는 사람이 가한 인공의 노력을 아무 말없이 받아들여 자연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인공의 부자연스러움을 온전히 감추고 본연의 모습을 보인다.
잎 떨어진 후의 허전한 알몸을 온전히 드러낸 그 모습이란..
낮은 자리에서 옆으로 벌린 그 가지의 고집스럽고 강건한 자태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하루 더 살아갈 기운을 준다.
존경심마저 일어나게 한다.
그 가지에 붉은 사과 한 알이라도 달려있다면, 스산한 계절에 일말의 따스함도 느끼리라.
저자는 "그리하여 모든 사과나무는 운동선수의 팔뚝처럼 굳세고 힘 있어 보인다. 곧게 뻗어오른 사과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대지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 역기를 드는 역도 선수의 용틀임을 느끼게 된다"라고 했다.
참으로 그러하지만, 아마도 저자가 그리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나무에서 생명을 본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여, 한숨을 모아 몸안에 가두어 두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어 마침내 따스한 생명을 피워내는 봄을 맞는 생명
여하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만 느끼었을 부석사 가는 길의 그 아름다움을 나에게 일깨워준 저자의 탁월한 관찰력을 존경한다.
절집만 본 게 아니라 절집을 아우르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애정어린 눈길을 주고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강건하게 하는 저자를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