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선생의 작품 천룡팔부 결말부에는 임종 직전의 선인태후와 북송 철종의 대화장면이 펼쳐진다. 철종은 선인태후 면전에서 왕안석의 신법 부활, 신법에 반대하는 구법파의 실각, 요나라에 대한 선제 공격 등을 하겠다고 밝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선인태후의 명을 재촉한다. 이 대화장면에서 여러번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며, 철종에 의하여 정계에서 축출되는 구법파의 대표인물이 다름아닌 자치통감의 주저자인 사마광이다.
자치통감은 사마광과 범조우 등이 전국시대 무렵(晉이 韓, 魏, 趙로 분립된 즈음)부터 북송 건국직전(後周 시기)까지의 사건을 연대 순으로 기록하여 294권 분량으로 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기보다는 교훈이나 경계가 될만한 기사를 선택하여 기록한 저작물이다.
사건 중심으로 기사가 펼쳐지고 있으나, 각 에피소드마다 주인공격인 인물이 상황을 풀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번에 리뷰 해야하는 <한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은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푸챵이라는 편집자가 58건의 에피소드를 추려 편역한 책이다.
추려낸 에피소드는 다양하다. 으르고 달래는 강온전략에 기반한 외교를 통하여 전쟁없이 상대를 복속시킨 소진․장의․반초로 대표되는 합종연횡 일화, 관료로서의 소임을 다하여 관리의 귀감이 된 前漢의 관료들의 일화, 외척에게 작위 부여를 끝까지 반대한 馬태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인재임을 증명한 毛遂自薦, 국운을 걸고 치러진 비수대전, 안사의 난 이후 힘이 미약해진 唐이 반독립상태의 번진을 또다른 번진의 힘으로 돌려막기하는 모습 등이 펼쳐진다.
여담으로 통사 성격에 가까운 이러한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수십년 또는 수백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선조와 후손의 입장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앞서 리뷰한 ‘결국 이기는 사마의’의 결말부에는 환범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마의는 고평릉사변 당시 그에게 군사령관을 맡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환범은 낙양성을 탈출하여 조상(사마의의 정적)과 조위황제 조방 측에 가담하였고, 이기지 못한 진영에 가담한 비용을 목숨으로 치렀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환범가문의 후손인 환온은 군사적 성과를 기반으로 사마의의 후손이 황제로 있던 東晉의 권력을 장악하였다.(환온은 竹馬故友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환온의 子 환현은 일시적이나마 황위를 찬위하여 사마의의 晉이 사라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는 역사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영화감독이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의도나 생각을 투영한 인물을 등장시키며, 이를 흔히 페로소나라고 한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작품(아톰)에도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작품(닥터슬럼프) 등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장치이다.
본서에도 그런 페로소나 격인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덕유가 사마광의 페로소나가 아닐까 한다. 안사의 난 이후 唐은 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다. 각지에 산재한 번진은 실상 할거세력이 되어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세력이 되었다. 唐황조는 통치가 아닌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 시기 책봉 등의 방식으로 반역하는 번진을 또다른 번진의 힘으로 돌려막기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 이덕유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안사의 난 이후 唐이 150년 가까이 더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덕유 당대의 상황과 사마광 당대의 상황이 묘하게 오버랩되는데, 절도사의 위협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唐과 마찬가지로 북송도 ‘전연의 맹’ 이후로 遼에게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신종과 왕안석이 신법을 통해 기대했던 효과는 재정확충에 따른 부국강병으로 遼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구법파 사마광의 입장에서는 취지에는 동감하나 종래의 방임정책이 통제정책으로 선회하면서 상업으로 경제와 문화가가 발전하던 북송이 침체된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덕유가 번진을 압박하여 唐황조를 지켜냈지만, 자치통감에서 나타난 이덕유의 수단은 책봉과 기존 시스템을 활용한 당근과 채찍에 대한 병행이었다. 이 부분을 사마광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굳이 새로운 법이 아니라도 기존 시스템의 보완으로도 국가를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이 이덕유의 분량을 늘려주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