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도서는 만화로 구성되어 있는 관계로 관심깊게 읽은 부분의 역사적 사실을 요약 정리로 갈음코자합니다.
[로마는 어떻게 이탈리아를 정복했는가]
공화정 초기 로마는 모든 이웃과 분쟁을 겪었다. 로마가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모색하는 사이 에트루이아 인, 갈리안 인, 그리고 여타 이웃 부족들이 로마 영토를 공격했다. 이과정에서 정체절명의 위기를 수차례 넘겼다. 종종 폐배 또는 내부 붕괴 직전에 결연한 의지로 사력을 다해 내부와 외부의 위협을 모두 극복했다. 이렇게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대제국을 위한 기초를 닥았다. 위기를 넘긴 로마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정복에 나선다. 로마의 적극적인 공세는 로마보다 앞서 남부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리스, 카르타고와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왕을 몰아낸 로마의 고민]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ㅣ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가 추방됨으로써 로마의 역사는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로마는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시대에 이르러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하던 로물루스 시대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로마는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었다.
[부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켄투리아 회의 한계]
로마가 왕정을 마감하고 공화정 시대에 접어들면서 켄투리아 회는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 모여서 입법, 사법, 선거 등 중요 정책의 결정권을 행사했다. 켄투리아 회는 기원전 218년 입법권을 인정받은 평민회가 입법권을 행사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입법 기관이었다. 켄투리아 회에서는 국가 반역죄와 같은 중대 재판의 경우에 사형이나 국외 추방을 결정하기도 했다.
후에 콜라티누스의 집정관직은 '시민들의 친구'를 의미하는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로 교체되었다. 그는 공화정의 전기간에 걸쳐 법률로 시행될 법안을 제안하여 켄투리아 회로 하여금 승인하도록 했다. 이 법안들 중에는 민중의 승인 없이 관직을 강점하는 자는 사형으로 처벌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시민은 마지막으로 켄투리아 회에 청원할 기회가 부여되는 내용도 있었다. 원로원은 이러한 법적 근거를 토대로 왕이 되려는 야심가들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공화정 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
집정관 체제에서 첫 번째 계층에 속한 부자들이 내린 결정은 타르퀴니우스 가문이 전쟁을 통해 정복한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한 토지를 다시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농지를 빼앗긴 수많은 소규모 장영노으이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들은 일거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로마에서도 딱히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임기가 불과 1년에 불과하던 집정관들은 일자리를 만들어 줄 대규모 공공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로마는 위기를 맞이한다.
에투리아 출신의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선동가들은 에투리아 인들이 로마를 식민지화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것을 타르퀴니우스 왕조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선동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 중에는 일부 사실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로마에는 경기장, 하수도 시설, 무대 배우, 권투 선수, 인기를 독차지하던 검투사, 성벽, 점성술사, 그리고 신들에 대한 숭배 의식 등 에트루리아에서 수입된 시설과 문화로 넘쳐 나고 있었다.
[쫓겨난 에트루리아 인들의 복수]
한때 로마를 지배한 타르퀴니우스 가문은 알바롱가, 라티움, 그리고 사비나의 수많은 부락과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에트루리아 도시는 결코 심각하게 파괴한 적이 없다. 당시 타르퀴니아, 클루시움, 아래초 등 에트루리아계 도시에서 활동하던 상인과 수공업자, 배우들이 대거 로마로 이주했는데, 그들은 노예가 아닌 귀빈 대접을 받았으며 로마 시의 경제, 문화, 산업 분야 전반을 장악했다.
공화정 수립으로 로마에서 에트루리아 인들이 축출됨으로써 라틴 족과 사비니 족이 에트루리아 인들을 대신해 군력을 장악했으며, 이들은 포르센나를 비롯한 에트루리아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포르센나는 뛰어난 장군이자 탁월한 지략을 갖춘 정치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로마와 전쟁에 돌입하기에 앞서 먼저 라티움과 사비니가 자신을 도울 것인지 그리고 로마에서 공화정 타도를 위한 봉기가 발생할 것이지를 확인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