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지극히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십자군을 보고, 겪었고, 기록을 한 '다른 편'의 이야기를 적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편은 곧 아랍이다."
"아랍 사람들은 십자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프랑크인들의 전쟁 내지는 침략이라고 말한다. 프랑크인들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지역, 저자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사실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다룬 '실화 소설'이었다. 그것도 여태껏 무시되어 왔던 관점에서, 서양과 아랍세계가 대치하였고 오늘날의 관계까지 결정하게 만든 격동의 두 세기를 다룬 실화 소설을 말이다."
- 이상 저자 머리말 중에서 -
인류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만큼 그 진실이 감추어진 역사적 사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교도에 유린당하는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귀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한 성전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래서 십자군의 영어식 표현인 Crusade는 성전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적어도 유럽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렇게 포장될 수 있었다.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그리스도 교인들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박해를 강력하게 바난하면서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을 호소하였다.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농민과 일부 기사들은 저마다 등과 가슴에 붉은 십자 표시를 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1096년의 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365년까지 9번의 대규모 출병으로 이어졌고 약 250년 동안 오리엔트와 소아시아 반도를 피로 물들였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의 침략 전쟁이고, 이방인들이 저지른 대학살과 약탈로 삶이 짓밟힌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은 638년 이슬람의 3대 칼리프 우마르가 정복한 이래, 이슬람의 세력권에 있는 도시였다. 예루살렘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메카,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제3의 성지이다. 초기 이슬람 교도들이 메카가 아닌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을 정도로 아랍 세계에서는 소중한 도시였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있기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은 기독교 유럽 사회나 비잔티움 제국 모두에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비록 예루살렘이 이슬람 교도들의 수중에 있었다지만 그리스도 교인들의 순례는 보호되었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갈 정도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기독교 순례자가 박해받는다는 종교적 호소는 다분히 정략적인 발상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진짜 속셈은 셀주크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와 오리엔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물자를 약탈하겠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에 있었다.
지금껏 우리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그 진상은 물론, 전쟁의 한쪽 당사자의 의견이나 생각은 배제된 평가만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공백을 메워 주는 책이 바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다. 이 책이 아랍 세계의 자료와 생각을 모아 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균형 잡힌 감각과 객관성을 가지고 십자군 전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당대 아랍 역사가와 연대기 저술가들의 생생한 묘사와 증언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아랍인들이 유럽의 그리스도교 교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으며 그들이 어떤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장 극악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에 분노하고 고뇌했던 당대 이슬람 지식인들의 생각이 절절히 배어 있다. 그 세세한 기록과 전율적인 묘사는 십자군 전쟁의 참모습을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슬람 세계 내부의 문제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귀중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소설처럼 구성된 이 책은 흥미진진한 서술로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 종교적 도그마와 중세의 자만에 빠져 이슬람 본래의 역동성을 상실할 채 표류하고 있는 오늘날 아랍 세계가 가진 문제는 십자군 전쟁에서 그 원인과 처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군 전쟁이 더 이상 두 종교의 적의와 이단화를 부추긴 자극제로 평가되기보다는 서로가 진지한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다지는 역사적 사건으로 재발견되기를 고대한다. 이 책은 그 길잡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