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란 무엇인가? 반야경이 이해]
이제 우리는 3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혜는 의역이고 그 음역이 바로 반야라는 것이죠.
반야란 무엇인가 바로 이 주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자아!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반야경"이라는 것은 한권의 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반야사상을 표방한 경전들을 총칭하여 일반적으로 "반야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계의 권위자인 히카타 류우쇼오는 의미 있는 중요한 반야경으로서 27경을 꼽고, 독일계 영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반야경연구 전문가, 에드워드 콘체는 40개의 반야경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모르는 반야경이 많을 것이고, 반야경전의 세계는 카운트방식에 따라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많은 반야경전 중에 제일 먼저 성립한 반야경으로 "8천송반야경"이라는 텍스트를 꼽는 데 사계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반야경의 성립은 대승불교의 출발]
자아~ 예기하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전문적으로 흘러 재미가 없어진 감이 있군요.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대장경 전체를 펼쳐놓고 얘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여러분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다 전달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먼저 왜 반야경 얘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집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간결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야경의 성립은 "대승불교의 출발"을 의미한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여러분께 상기시켜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반야경이 성립하면서 대승불교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대승불교"라는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야경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리고 또 소승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반야경전들과 "반야심경"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한국의 선불교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반야 얘기로 튀었는지, 이런 것들이 충분히 얘기되어야만,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반야심경의 심은 무슨 뜻?]
"반야심경"의 '심(心)'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야를 성취하는 우리의 마음을 설하는 경처럼 오해하는데, 여기 '심'은 '흐리다야'의 뜻으로 그러한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물리적인 용어로서 신체의 중추를 형성하는 심장을 의미합니다. 육단심이라고도 번역하지요. 그리고 밀교에서 만다라를 그릴 때 그 전체구도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심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말의 '핵심'이라는 말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이란 600권의 방대한 "대반야경"의 핵심을 요약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반야경"과 "반야심경"의 부피는 1,000만 대 1 정도의 차이가 나지만, 그 무게는 동일합니다.
["대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엉터리 이해들]
우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대승"이라는 용어가 매우 부정확하고 근원적으로 타당치 않은 의미맥락에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라 하면 소승불교와 대비되는 상대개념으로 이해되고 있고, 지역적으로 중국/한국/일본의 불교는 대승, 버마/타이/스리랑카 등 남방의 불교는 소승이다. 이런 식의 도식적 이해는 참으로 엉터리 이해입니다.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까지를 소승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엉터리 이해입니다.
대승이라는 것은 소승이라는 개념의 짝으로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대승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을 지칭하는 말로서 태어났습니다. "대승"은 문자 그대로 "큰 수레"를 의미하는 데 그것은 원어로 "마하야나"라고 합니다. 이것을 음역한 것이 "마하연"인데 재미있게도 이 용어가 "도행반야경"에 나옵니다. 그리니까 "마하야나" 즉 "대승"이라는 말은 AD 1세기에는 확립된 개념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소승" 즉 "히나야나"라는 개념은 그것보다 최소한 200년 이후에나 나타납니다. 즉 "큰 수레"라는 말을 쓴 사람들이 이 "큰 수레" 운동에 따라오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대비적으로 지칭하여 비하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