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었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라는 문제로 디종 아카데미가 기획한 현상 논문에 응모하는 형식으로 씌어졌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인간이 타락하는 상황과 과정을 다룬다. 이 책에서 루소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사치 때문이 아니라 불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본래 평등했던 인간이 어떻게 불평등의 길로 들어섰는가를 조직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사회의 타락한 특징들이 제거된 가상의 세계이며, 그의 출발점은 알려진 정보가 별로 없는 머나먼 과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현재 세계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목적은 인류의 보편사를 더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형태 속에 투영된 인간 본성 이론을 탐구하는데 있다.
인류 역사에 대한 가상적 추론을 통하여 루소가 상상한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은 '고독하고 무사태평하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튼튼하며, 자연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생각도 정열도 없고, 예측도 기억도 없는 동물'이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악 개념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해서 사회적 질서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상호간에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홉스의 성악설에 루소는 정면으로 반대한다. 루소가 생각하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악 개념, 미덕과 악덕의 개념 이전에 있기 때문에 악하지 않으며, 악해야 할 이유도 없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쉽사리 양식을 찾고, 무한히 넓은 공간에서 홀로 떨어져 살기 때문에 공격적이 되거나 적과 다툴 이유가 없다. 또한 규칙도 구속도 없이 살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족적인 삶을 누리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강자의 법칙이 적용될 수 없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속박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불평등의 악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행복했던 상태를 상실하게 되었는가?
만인이 평등을 향유할 수 있었던 원초적 자연 상태는 행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연적 장애, 다른 동물들과의 다툼, 인간의 점차적인 수적 증가에 따른 먹이의 상대적 결핍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숲속을 홀로 떠돌며 지내던 인간은 점차 한데 모여 함께 살아가게 된다. 공동 생활의 경험ㅇㄴ 타인들에게 인식되고 가장 강한 사람이나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비리기를 바라게 되었으며, 그의 존재가 상대화되고 타인등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 된다.
또한 사적 소유가 정립돈 다음에 생산 수단의 사유화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종속적으로 만든다. 개인의 가치는 존재에서 소유로 바뀌게 된다. 마침내 상속의 작용에 의하여 토지 전체가 특정한 인간들의 사유물이 되면 약하고 능란하지 못하고 앞날을 예측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전에는 공동의 재산이었던 것을 완전히 박탈당하게 된다. 평등이 깨지고 난 후의 상황은 끔찍스러운 무질서의 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이는 이런 무정부 상태에서 부자들은 빈자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한다. 마침네 부자들은 인간의 정신 속에 일찍이 스며든 적이 없는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부자들은 법률과 경찰력에 의해 처방되는 치안 질서 유지를 통해 부자의 특권은 확고해지고 불평등은 제도적 가치로 바뀌게 된다. 사회적 질서의 확립이라는 이 단계를 넘어서 각종 정부 형태가 나타나고 사회 내의 인간 관계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변모되어 가면 정부는 다시 인민들에게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무질서와 변혁이 일어나며, 이렇게 하여 가장 힘센 사람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연 상태가 정립된다. 이것은 최초의 순수성을 유지한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과도한 타락에 바탕을 둔 자연 상태인 것이다.
이 불행한 문명을 치유할 방법은 없는가? 우리는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자연의 조화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길 전체를 다 가야만 한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인간다움과 이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안전과 자유를 계획하면서 미지의 세계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루소의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