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만주인이 청나라를 세우고 번영을 구가하는 시기부터 1800년대 이후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충돌하여 변화하는 시기를 거쳐 근대로부터 현대 중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현대 중국은 청나라 왕조 체제가 지녔던 약점을 극복하면서도 정치 체제에서 그 장점의 일부를 받아들였고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을 거치는 동안 만들어진 국가 체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렸다. 어떤 점에서 중국 근대사는 왕조 체제가 끝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한 왕조가 멸망하면 다른 왕조가 등장했는데 청나라 다음에는 왕조 대신에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한다.
만주인은 청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를 갖춘 왕조 체제를 확립했다. 그들은 국내에서 소수로서 절대 다수의 한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한인들을 포섭하는 만한병용을 취했고 그와 동시에 주방(駐防)을 설치하여 정복자이면서 통치자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인했다. 대외적으로는 예부와 이번원을 통해 명나라의 영토를 이어받은 곳과 새롭게 확보한 지역을 분리하여 관할했다. 만주인의 왕조체제는 군사력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강희제, 웅정제, 건륭제 세 황제를 거치면서 중국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고, 이는 18세기으 번영을 구가하는 토대가 되었다.
청나라 중심의 천하에서 동등한 국가 사이의 외교나 무역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건륭시대부터 청나라에 자유무역과 평등한 외교를 요구했고 청나라의 힘이 약화되자 자국의 의지를 관철시키려했다. 두 제국 사이의 양보없는 대립으로 청영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패배는 만주인들이 만들어내 청나라 중심의 천하에 흠집을 냈다. 이제 청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외부 세계를 바라보던 질서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난징 조약으로 열린 항구들에서 형성된 변화의 분위기는 제한적이었다. 그 분위기와 변화에 대한 절박함이 청나라를 움직이는 핵심세력들의 생각을 바꾸게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여건이 성숙되어야만 했다.
1901년 신축조약 이후 청나라 조정도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남부 지역에 독무들은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독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의화단 사건 이후 가중되는 재정적 압박속에서 실제로 중앙에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고 여겼으며, 심리적 결별 상태에 놓였다. 이제 군인들이 차츰 사회의 중심이 되는 상황에서 청조은 신정을 추진했는데, 이 신정이 오히려 혁명을 가속화했다. 1911년 혁명파는 봉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군사력과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혁명의 성과는 군사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손에 넘어갔고, 청나라 황실은 한동안 명맥만 겨우 유지했다.
중화민국은 중국인들에게 무기력하고 나약한 만주인의 왕조를 대신하여 힘 있고 활기찬 국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와 그 후계자들은 공화 체제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그 반대파는 시민보다 소소의 인물과 집단에 의해 신해혁명의 열매인 공화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결과 갓 태어난 중화민국에서 공화체제는 중국 사회에 뿌리조차 내리지 못했고 왕조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과 그에 맞서는 세력 사이의 전쟁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901년 이후 교육제도가 바뀌면서 과거 향신들을 대신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성장했다. 새로운 학교 제도였던 학당에서 배우고 성장한 세대는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익숙했다. 신세대 학생들은 신해혁명을 경험했고 5.4운동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과시했다. 이제 중국에서도 학생들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시민들이 차츰 성장해갔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 현실은 여전히 군벌이 열강과 결탁하고 사적 이익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는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운동과 시민의 성장은 특정 인물과 집단을 중심으로 행동했던 진보 세력의 생각을 바뀌게 했다.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바꾸고 대중 정당으로서 발전을 모색했다. 천두슈 등은 코민테를 지원을 받은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군벌이 서로 다투던 베이징 정부의 무능과 매국적인 태도에 중국인들은 환멸을 느꼈고, 그 환멸은 공산당을 흡수하여 전열을 정비한 국민당, 그리고 국민당이 주도하는 국민혁명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난징 정부는 북벌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에서 체계가 잡힌 정치 체제를 만드는 토대를 마련했다. 난징 정부는 군벌을 정리하는데 성공했지만 베이징 정부의 부채를 떠안은 처지였기에 경제를 부흥시킬 힘이 부족했다. 더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일본이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어려움에 빠지고 만다.
난징정부는 여론에 밀려 국공합작에 동의 했고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일전쟁 시기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투에서 국민군과 팔로군 사이의 협력이 유기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난징 정부는 공산당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공산당은 도시의 배후 농촌에서 지속적으로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일본이 패망한 후 난징 정부는 중국인들의 기대와 다리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공산당은 농촌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세력을 확대했다. 국민정부와 공산당 사이의 불신은 내전을 야기했는데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국민군이 초반의 우위를 지키지 못하고 패했다. 반면 공산당은 농촌과 농민을 중심으로 한 혁명 전략을 통해 국가 권력을 손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