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번 독서통신연수에서 기대했던 책은 심판이 아니라 보건교사 안은영이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선정하면서 하나의 책을 더 선정해야 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베르네르베르베르만 보고 결정했다 봐도 될 정도로 작가에 대한 신뢰가 높았었다. 내가 처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읽었던 것은 단편소설집 '나무'였다. '나무'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는 고령화가 심각해진 사회에서 노인을 부양하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버리는 것이 합법화 되었을 때를 상상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고려장'의 모습이 미래 시대에 구현되었을 때의 모습과 비슷했는데, 노인의 입장에서 동 소설이 진행되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이유는 실제 현대 사회에서 고령화가 진행 중이고, 연금 등 노인 부양의 문제로 세대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베르나르베르베르라는 작가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에 무한한 상상력을 덧붙여 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생각할 수 있게 만다는 작가였다.
이 책의 구성은 극의 형식을 띈다. 소설인 줄 알고 시작했었는데 연극 대본과 같아서 장면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제 1막에서는 폐암 수술 중 사망한 주인공 아나톨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천국에 도착해서 변호사, 검사, 판사를 만나게 된다. 제2막에서는 주인공의 지난 생을 돌이켜보는 절차가 진행되었고, 제3막에선 다음 생의 모습이 결정된다. 책의 구성은 유명한 한국 웹툰이자 영화화된 '신과함께'를 떠올리게 했다. 웹툰 신과함께에서는 나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평범한 남자 김자홍이 저승에서 49일 동안 일곱 번의 재판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근본적으로 신과함께의 모델은 한국 신화로 권선징악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에 남에게 어떻게 베풀고 살았는지를 심판하는 '도산지옥', 남을 속여서 돈 번 자들을 심판하는 '거해지옥'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심판에서는 이 같은 권선징악적인 기준과는 다른 기준을 보여준다. 남에게 얼마나 배려하고 베풀었냐는 심판의 기준이 아니다. 이 보다는 스스로의 삶에 얼마나 충실했느냐와 같은 것이 심판 기준이 된다. 이 소설에서 검사는 주인공 아나톨에게 순응적인 삶을 살았다며 비판한다. 최고의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단순히 현재의 배우자에 충실하였고,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적성을 찾기보다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에 안주하였다고 말한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사후세계 심판에 대한 플롯이나 그 속에서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바는 달랐다는 것이 신선했다.
다만,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사후세계의 심판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비판점은 생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너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냐!'라고 외치는 검사가 오늘날의 꼰대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것은 합리적인 기준인가, 과연 인간은 모든 것에 도전하여 자신이 최적으로 맞는 적성과 배우자 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사회에서 그런 도전과 실패를 인정해주는가도 고려해봐야할 문제라고 보여진다.
패배주의적인 시각일 수 있으나, 한국에서 실패는 크게 용납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어린 나이가 얼마나 가치있게 여겨지는지 느꼈고, 실제 자신이 원하는 일에 도전하고 실패하였던 사람들이 취업이라는 재도전을 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도 옆에서 볼 수 있었다. 모 기업의 경우 여자는 26세가 넘으면 서류에서 탈락하는 등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었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로, 혼인 적령기를 지난 사람들에게는 늘 "더 늦기 전에 결혼해야지 ~ " 라는 얘기가 들린다. 과연 이런 시선에 전혀 굴하지 않고 나 자신의 삶을 충실이 사는 것이 가능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건 불가능해!"라는 반발심이 들었으나, 또 어찌보면 이런 책이 나옴으로써 나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고 나만의 타임라인을 찾아가는 것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기도 하다. 어쩌면 검사에게 혼나는 것은 아나톨이 아닌 나였을지도 모른다. 반항적인 마음이 자꾸 들긴 했지만 또 다른 시각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