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저자 알랭드 보통이 '예술이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지'에 대해 쓴 책이라니, 호기심에 집어든 책이다.
기억에 남는 몇가지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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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재평가하고 다시 갈망하게 되는 법을 고려할 때, 예술가들이 익숙하는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
연인과 예술가는 똑같은 인간적 약점에 부딪힌다. 쉽게 지루해지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단 알고나면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는 보편적 경향이 그것이다. 따분해져버린 것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되살리는 능력은 위대한 예술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작품들은 이미 익숙해져서 간과하기 쉬운 경험의 감춰진 매력을 일깨워 준다.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의 가장 인기있는 화가를 언급하며, 라 로슈푸코의 사랑에 대한 통찰을 미술에 적용해 명언을 만들어 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 와일드의 말은 사람들이 영국의 수도를 관통하며 흐르는 물 위에 떠다니는 짙은 수증기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정확한 요점은 화가가 풍부한 재능을 통해 안개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봐도 흥미나 짜릿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꺠우는 힘이 된다. '
분명 휘슬러는 런던의 매일 늘상 깔려있는 안개를 보고 그렸을텐데, 휘슬러의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은 안개의 낭만, 아름다움을 재조명하고 그제서야 런던의 안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게 진정한 예술이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 그림이 그렇다. 화면에 있는 물방울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과 그 그림자. 너무나도 단순한 이 그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흔하디 흔하고 주변에 늘상 널려있는 물이 이렇게 아름다운 객체일 수 있다니. 비가 오는 걸 참 안좋아했던 나였는데 여전히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는 못해도 이제는 비오는 날 창가에 맺힌 빗방울을 꽤 센치하게 감상할 줄 알게 되었다.
예술을 통해서 일상의 무료함과 따분함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통해 내 가족과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치도 환기시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늘 같이 있는 공기같은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특별함을 늘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예쑬이 사랑에 관해 해 줄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삶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는 주체는 개인뿐만이 아니다. 인간 집단, 더 나아가 사회전체도 우리의 삶을 균형있게 잡아줄 수 있게 예술에 의존할 수 있다...실러는 고대 그리스에서 화가들과 극작가들이 풍경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은 사실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그리스인은 내적으로 자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을 회복하기 위해 직관세계의 대상을 창조할 욕구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인간의 삶에서 자연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사라지기 시작할 떄 비로소 자연은 시인의 세계에서 심상으로 출현한다. 삶이 더 복잡하고 인공적이 될수록, 사람들이 실내에서 더 많이 생활함에 따라 자연의 소박함을 보충하려는 갈망은 더욱 강해진다.'
예술이 사회의 부족한 것,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멀어진 자연과의 거리를 채워주는 균형의 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 예술의 영역과 역할은 점점 더 커지게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즘은 출근을 해도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타고 이동해서 회사의 주차장을 통해서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다. 좋게 말하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전천후 통근이 가능한 우산도 필요없는 편리한 생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눈이 와도 눈을 만질 기회, 비가 와도 비의 냄새를 맡을 기회를 박탈 당한 것이다. 편리를 추구하니 이루어낸 생활인데 자연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현대 건축만 봐도 통창을 이용해 벽면 한쪽을 터서 자연을 집안을 끌어오게 하려는 시도나, 큰 창을 내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든 찰나를 액자처럼 활용하는 인테리어가 꽤나 인기다. 그래서인가 요즘 나도 하늘의 파란사진, 나무의 푸른 사진, 바다의 파란사진만 봐도 힐링이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