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는 진짜 장사꾼
전국 소시장의 제일 큰손이었던 3대가 잇는 정육점
팔판정육점
그는 "나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기희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안성,음성 쪽에서 첫 고기가 자정 넘어 옵니다.
이 양반들에게 잘해주고 고기를 제꺽제꺽 받아야 해요.
그때 잘해주지 않으면,기사들이 우리 고기를
소중하게 다뤄주지 않습니다.
한번은 고기가 망가져서 생기는 손해를
제가 계산해봤어요.
연간 5천만만 원입니다.
그러니 기사들 힘들지 않게 고기 잘 받고,
비상대기해야지요.
제가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해요.
이 좁은 가겟방에서 대충 잠을 자는 거지요.
장사꾼은 그래야 해요.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돈이 그냥 벌리나요."
아,놀랍다. 내 마음에 지진파처럼 파동이 밀려든다.
'돈이 그냥 벌리나요' 이런 계산은 아무에게서나
나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굴지의 사업을 50년 굴려본 사람의 계산이다.
팔판동이 어딜까 했더니 북촌이었다.
정육점이 이렇게 오래될 수도 있구나 한번 놀라고,
정말 자신의 존재가 없는 삶을 사신 주인장의
인터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돈이 그냥 벌리나요'
이 계산은 지금 우리도 똑같다.
노포의 사장님들은 거의 비슷했다.
처음에는 그냥 시작했더라도 프로가
되지 않으면 한 길을 이렇게 오래
지속해나갈 수 없었다.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어깨 너머로
배우거나 잠잘 시간을 줄여 일했던 세월들..
재료를 아끼지 않는 마음까지..
팔판정육점은 아들 준용 씨가 합류하면서
3대가 잇는 정육점이 되었다.
준용씨는 미국에서 MBA를 하고,경제학을 부전공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연봉이 높은 엘리트였다고 한다.
이제 사장님도 몸이 좋지 않고 고민이 많았은데
모 재벌기업에서 80억에 팔라고 했단다.
사장님도 아버지에게 돈 주고 샀으니 자식에게
넘겨야지 싶어서 아들이 받던 봉급 두 배 준다고
해서 가게로 불렀다고 한다.
역시 아버지의 아들!!
팔판정육점은이 책에 소개된 우래옥과
하동관과는 개업이후부터 70년 고객이다.
옛날 우래옥에 소 혀를 댔는데,4년동안
밑졌지만 가게에 말도 안했단다.!!!
국내 최장수 근무,
60년 차 주방장의 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업력 80년의 소갈빗집
조선옥
1937년 창업
나를 포함해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시도했으나
이곳은 금단의 영역과도 같았다.
홍보할 필요가 없는 가게이기 때문이리라.
3대째인 지금 사장 김진영 씨가 허락을 했다.
"뭔가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선옥이 오래된 집인데 역사의 흔적이 사람
기억에만 있어요. 아차,싶었지요."
지금 이 활자는 아마도 조선옥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기록이 될 것이다.
팔순이 다가오는 '고용'주방장이 있는
전설적인 식당으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박 주방장은 올해 79세,
입사 60년 차다. (고용 주방장이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노포에는 이렇게 오래된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많아
전보다 활동이 느려진다고해도 입금을
더 높여주는 곳도 많았다. 그분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조선옥은 1950년 초에 낮술을 팔다
걸린 가게로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ㅋㅋ
어수선한 시절 사회 기강 잡는다고 행정
당국이 낮술 단속을 했단다.
예전 기억은 이제 단골들의 머리속에만
있어 옛 사진을 공모한 적이 있다는데
별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옥에서 찍은 것 같긴 하지만,
내부 사진에서는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사라지는 것들이 모두 아쉬워진다.
장사꾼은 골목의 신뢰를 얻어야 성공한다
생맥주와 노가리로 상징되는 서울의 원조 호프집
을지오비베어
1980년 창업
나는 이 가게 창업주와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올해 연세 무려 아흔,과연 나오실 수 있을까.
어렵게 청을 넣었다.
낮2시. 밖에서 택시가 도착한다.
창업주이신 강효근 선생이 인터뷰를 위해
기꺼이 거동하신 것이다.
나는,솔직히 미리 마신 두어 잔의 맥주에
혈관이 뜨거워져 있었는데 그의 등장에
눈시울이 뜨겁고 묵직해졌다.
아아,한 시대를 살아낸 우리 아버지,할아버지의
얼굴,그는 그런 낯빛으로 차에서 내렸다.
을지오비베어 창업주 강효근 선생을
만나는 장면은 왠지 영화같았다.
가게로 들어오는 장면과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 그리고 그동안의
이야기까지...
그는 여든일곱 살까지 이 가게에서
맥주 따르는 '디스펜사'(디스펜서)를 잡았다.
그는 놓지 않으려던 그 디스펜사를 탈장
수술을 하고 자연스레 딸에게 물려주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 을지로가 핫한 골목이라서,
TV에서 이 가게를 본적이 있다.
따님이 노가리를 굽고 디스펜사를
잡은 모습까지 봤다.
물론 나는 그 술맛을 잘 모른다.
하지만 창업주가 설명하는 그 맥주맛에는
디테일이 있었다. 그 맛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 가게가
손님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영화가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업주 할아버지는
멋졌다.
제일 어려운 일은
직원에게 시키지 않는다
의정부 평양냉면 계보를 잇는 서울 5대 냉면집
을지면옥
1985년 창업
냉면은 여전히 신비로운 음식이다.
좀체 인터뷰를 안 하는 냉면집들의 고집도 한몫한다.
맛의 비결은 '변하지 않는'것이라는 을지면옥.
새벽 5시에 일어나 육수 뽑는 걸 하루도 미뤄본
적이 없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만둔다,그만둔다
하면서 어느덧 서른 해를 훌쩍넘게 영업을 이었다.
의정부 평양면옥집의 딸로 을지로 시대를
열었던 지난 시대의 말들이 쏟아졌다.
냉면 잘하는 법이 궁금한가?
한번 들어보시라.
을지로3가역에서 5번 출구로 나오면 이 냉면집을
만날 수 있다.2층에 을지다방이 있는 그곳이다.
사위가 부모님께 냉면 기술을 배웠고
아직도 환갑을 한참 넘긴 그가 주방장을 하고 있다.
을지면옥의 변하지 않는 맛의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유훈이다. 우리 식구들 냉면은 모두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손님들 중에는 옛날 맛이 나니네
그러시지만 만드는 방법에는 변화가 없다고.
냉면은 남는 장사가 아니란다. 여름만
보면 잘 되는 것 같지만 비철이 아주 길고,
메밀값,소고기값이 비싸서 감당이 안 된다고.ㅜㅠ
주방과 홀 중에 홀이 더 힘들다고 하는데
이유는 손님 다수가 남자이고 노포들일수록
다들 단골 대우를 바라기 때문이란다.
천대받던 불량식품,
그래도 지킬 건 지켰지
서울 정릉 일대를 대표하던 인기 떡볶이집
숭덕분식
1977년 창업
메뉴가 꽤 있다. 라면과 냉면에 쫄면
같은 면류에 '오뎅'과 핫도그,두 가지
버전(?)의 떡볶이가 있다.
김밥도 맛있기로 유명하고 튀김도
<한겨레신문>에서 서울 시내 분식집
맛 랭킹조사에서 분야 1위를 한 적이 있을 정도다.
떡볶이를 워낙 좋아하는 내가
이 분식집을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박찬일 셰프는 떡볶이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시 대단!
떡볶이는 원래 부자들의 음식이었다.
설에 떡을 뽑아 먹고 남은 음식을 처분하는
방법으로 떡볶이를 해먹었다.
남을 정도로 음식이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자들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간장 떡볶이였다.
지금의 '궁중떡볶이'말이다.
정말로 궁중에서 먹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것이 북촌의 민가에 퍼지면서 '궁중'이라고
이름 붙였을 것으로 추측했다.
1960년대 말,1970년대부터 우리가
익히 즐겨 먹는 매운 떡볶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즉석떡볶이가 인기를 끌었다.
노포들은 처음에는 무허가로 시작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숭덕분식도 마찬가지다.
리어카로 행상을 하다가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서 밤을 샌 적도 있단다.
나중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숭덕스낵에서
지금의 숭덕분식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 출범 초기에는 사회악을
없앤다면서 학교 앞 불량식품을 포함시켰다.
물론 떡볶이도 포함된다.ㅋㅋㅋ
가끔 역사는 웃음을 짓게 한다.
호쾌한 사업 수완으로
60년을 지속하다
서울 동부 지역의 내력이 돋보이는 평안냉면집
동신면가
"냉면은 여름 한철 반짝이에요.
그걸 팔아서는 직원들 월급도 못 줍니다.
그래서 선친이 일찍이 고기도 같이 팔기
시작한 게지요."
"다른 이유가 있어요.
여름에 관청에서 단속을 하면 거개
영업정지를 당해요. 육수에서 균이 나오거든.
대부분 냉면집이 동치미를 안 쓰는 이유도
그것이오.
여름에 목매었다가는 망하기 딱 좋으니까."
동치미는 가열처리할 수 없다.
게다가 예전에는 무,배추에 인분을
비료로 썼다. 무조건 대장균이 나온다.
영업정지에 벌금.심하면 구속도 당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박 사장의 '냉면집'은
점차 고깃집의 성격을 띠게 된다.
부친 고 박지원 옹이 동두천에 처음
만든 '평안냉면'은 그렇게 해서
사라진 이름이 됐다. 대신 아들 박영수
사장 대에서 '동신면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평안냉면,참 아까운 이름이다.
냉면집이 점차 고깃집으로 성격이
바뀐 이유에 이런 사정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ㅋㅋㅋ
냉면과 고기는 잘 팔렸는데
좋은 고기를 쓰고 싸게 파니까
처음에는 남는 게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그가 직접 고기를
배우기로 했다. 그는 현대건설 출신이다.
우시장에 뛰어들어 소 사들이는 것부터
배웠고,정육점을 하기도 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전후로 소고기의
대량 소비가 단군 이래 최대였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요식업 단체 회장에
출마했다가 벌어둔 돈을 어지간히
까먹었따고 한다.ㅋㅋ
지금 암사동으로 오면서 아버지의 냉면을
막국수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다고 한다.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예전에는
냉면을 막국수,국수라고 불렀단다.
몽골에서 생산된 메일을 구해와
그날 쓸 것을 바로 갈아 만든다고 한다.
사장님의 20대 아들 현웅씨는
상암동에 동신화로라는 식당을 열어
혼자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뭐가 다르긴 다른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