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가 중 끊임없는 주변 열강의 침략으로 시련을 겪은 역사를 가진 국가를 하나 꼽는데 있어, 폴란드를 그 예로 드는 것에 대하여는별로 이의 제기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 드는 지정학적 이유로 그 나라는 끊임없이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 부터 시달림을 당해 왔다. 국민들의 의식 수준, 애매하기는 하지만 통상 말하여지는 국민성 등은 논외로 하고, 예나 지금이나 세계질서를 결정짓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질서는 유럽의 가운데에 좋은 먹이감으로 놓여있는 이 나라를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근대이후의 폴란드 수난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해 보고, 외세로부터 독립후 취해온 주변나라(특히, 독일)와의 관계설정 과정, 지난 역사에 대한 화해진행 과정을 우리의 입장과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말 프로이센, 러시아 , 오스트리아는 3차에 걸쳐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였다. 1차 분할(1772년)은 러시아 단독으로 폴란드를 합병할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성립하였고, 2차 분할(1793년)은 오스트리아가 불참한 가운데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분할 차지하였으며, 3차 분할(1795년)은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폴란드 민족 독립혁명(1794년)에 이은 바르샤바 임시정부를 진압하려고 침략하여 발생했다. 이후 폴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말까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3개국에 의한 분할 점령을 거친 이후 1918년 폴란드는 독립국으로 재탄생하였고, 이 책 내용은 1919년에 쓰여졌다. 1919년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깊은 해로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 본격적인 수탈과 탄압으로 핍박받던 시기였다. 삼일독립운동의 열망이 온 국토를 휘감고 있었다. 저자는 1857년 러시아제국의 식민지였던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귀화했는데, 폴란드의 국민성의 대략적 면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폴란드 국민에 있어 공격성이라는 것은 정말 이질적인 기질이다. 폴란드만큼 국가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신념이 다른 나라를 정복한다는 이념보다 몇 배 소중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폴란드가 싸웠던 전쟁들은 모두 방어전이었고, 대부분은 국경 내에서의 싸움이었다. 폴란드가 자주 당했던 이유는 불운하게도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이책 229쪽)
다음과 같은 저자가 타인의 말을 인용한 표현도 눈길을 끈다. "폴란드는 영원히 독일과 러시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대책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독일이나 러시아와 우정을 맺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면 괴물밖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저들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가족,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까지 탄압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심에 불타지 않았습니다. 우리 손에 쥐여진 것이 절망이건 희망이건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었고 정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이책 235쪽) 또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언급도 있다. '독일의 복종 성향과 러시아의 무법 성향은 폴란드와는 아주 이질적이다. 폴란드는 상반된 두가지 성향을 동시에 지녔다. 지나친 개인주의가 하나이고, 집권 세력의 결정을 그대로 믿어 버리는 성향이 다른 하나이다. 이런 이질적인 두 성향은 폴란드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해왔다.'(이책 237쪽)
그러나, 폴란드의 수난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독립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3국 중 특히 독일인에 대한 폴란드인의 감정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유럽과 비교를 통한 동북아의 '역사화해' 가능성, 史叢86(2015.9.30), 183쪽, 이하 '논문'으로 표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독일과 소련은 이른바 '히틀러-스탈린 협정'으로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39년 9.1일에 독일이, 9.17일에 소련이 침공하여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다. 1940년 폴란드 양심수 728명을 시작으로 이후 대규모로 유태인과 폴란드인이 희생되었다. 이와 반대로 독일인의 희생도 많이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가 다시 독립하면서 폴란드는 소련, 독일과의 영토가 조정되었고, 이 과정에서 독일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폴란드가 새로 편입된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인을 '강제로' 추방하면서 1950년 종결 시점까지 약 8백만명에 달하는 추방 독일인 중 40만 명에 가까운 독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당시 동독 보다는 서독과 체제 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국경문제와 독일인 강제 추방으로 갈등이 극심했다 한다.(이하 논문 184쪽)
폴란드 격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폴란드인과 독일인은 형제가 될 수 없다." 또한 독일에서는 '폴란드는 잠정적인 한철국가(Saisonsstaat)' 라고 지칭하거나, 폴란드인을 공공연히 '벌레', '폴란드 들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고한다. 그러나 인접한 국가가 언제까지나 반목과 질시의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국가의 미래에 어두움만 더할 뿐이다. 결국 양국 시민사회, 종교단체와 정부의 노력이 결합하여, 2차대전이후 영토문제, 배상문제, 역사문제 등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요소들을 넘어서서 2008년 1월 양국 외무장관이 만났고, 양국간 공동역사교과서를 만들기로 합의하는 성과에 이르렀다.
역사화해를 위한 이러한 타국의 성과도출은 한국을 포함한 일본, 중국 등 동북아 역사대화에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인접국가간 우호와 신뢰 회복, 평화관계 형성이라는 대의는 다른 어떠한 외교, 안보, 갈등에 우선하여 추구되어야 하는 목표라는 점은 부인될 수 없을 것이다. 그간 한국과 일본간에는 1995.8월15일 50주년 종전기념일의 무라야마담화(다만,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문제와 군위안부 문제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와 1993.8월 당시 고노관방장관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 1998.10월 김대중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수상의 공동선언 등 역사화해 노력이 있었지만, 이후 일본내 국수주의 부활(보수우익의 혐한, 야스쿠니 참배 등), 전쟁범죄 사죄 미흡, 영토문제, 일분군 위안부와 강제징용등 피해자 배상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등 오히려 갈등은 심화되는 양상을 띄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간차원의 역사공동 연구 등 타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역사화해의 첫발을 떼려는 한일 민간차원의 노력은 거의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편, 한국과 일본에 더하여 중국 까지 포함하는 역사공동연구도 기획되어 2002.3월에 중국 난징에서는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이 개최된 이후 계속된 회의와 공동집필 과정을 거쳐 2012.5월에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출간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패권주의 부활, 영토문제 등으로 앞날이 순탄치 않다.
한국의 입장에서 인접국가인 일본, 중국과 등을 지고, 국가의 안전, 평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당한 인식, 역사적 청산을 외면하고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가해자에 굴복하고 평화를 구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최소한 역사인식에 있어서 만이라도 왜곡된 사고를 배제하고,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여 잘된 역사는 잘된 역사대로, 잘못된 역사는 잘못된 역사대로 사실을 인정하여 동시대인과 후세에 전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민족의 행복과 평화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반성, 호혜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지속적 노력이 향후 동아시아 지역 평화 유지와 번영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