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는 여러 부정적인 제도, 질서 중에 가장 나쁜 것 중에 속하는 노예제도, 인간이 인간을 물건으로, 마음대로 살리고 죽일 수 있는 벌레 보다 못한 무엇으로, 시장에서 사고 내다팔 수 있는 유용한 상품으로, 인간이 인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편리한 도구로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창조물.
인류가 문명을 개시한 이래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이 야만적인 제도를 살펴보고자, 가장 접근하기 쉬운 미국의 노예제도의 해방과 이후, 우리 조선의 노비제도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18세기 초 서아프리카 두칸다라 부족의 왕자 브로티어는 여섯살 때 다른 부족이 쳐들어왔을 때 잡혀, 아버지가 칼로 찔려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목줄에 묶인 채 머리에 맷돌을 이고서, 1000km를 끌려가야 했다. 어두운 지하감옥에서 몇달 동안 갇혀 지낸 후 노예상인에 의해 신대륙으로 끌려갔다. 아홉살 때는 밤마다 엄청난 양의 옥수수를 빻아 다음날 가축에게 줄 먹이를 준비했다. 만약 충분한 양을 준비해 놓지 못하면 가혹한 벌을 받아야 했다. (이책 125쪽) Freedom Trail에 있는 그의 묘비(자기 성을 '스미스'라고 지었다)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지만 자신의 근면성으로 돈을 벌어 자유를 샀다"고 적혀 있다. (이 책에는 그의 일대기가 적혀 있지 않고, 다른 노예의 경우도 에피소드식으로 나열되어 있어 삶의 전반을 알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노예는 주로 농업 경작지에서 일했다. 처음에 남부의 농장주들은 쌀 재배에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황금해안(서아프리카 가나 기니만의 연안)이나 감비아 같은 아프리카의 쌀 경작지대에서 온 아프리카인들이 쌀농사에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이후 많은 노예가 유입되었다. 그들의 지식과 기술 덕분에 오늘날 쌀은 미국의 주요작물이 되었으며, 농장주들은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4월에 볍씨를 뿌리고나서는 여름 내내 뱀과 악어, 모기들이 들끓는 논에서 맨발로 모자도 없이 일을 했다. 하루의 긴 노동이 끝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작물을 키우거나 내다 팔 물건을 만들었다. 하루종일 논에서 일한 후에 대부분의 여성노예들은 키로 쌀겨를 골라내는일을 더 해야 했다. 이런 혹사는 노예들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아마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남은 평생동안 앞으로도 그런 일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이책 125-128쪽)
미국의 독립선언서문의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단지 백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인종차별적인 인권선언이었지 피부색이 다른 인종, 흑인 등과는 상관없는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선언문 이었던 것같다. 미국 건국의 지도자인 조지 워싱턴은 생전에는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한 토마스 제퍼슨도 노예를 포기하지 않았다. 1863년1월1일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대통령조차도 그 이전까지는 노예해방보다는 미국헌법과 연방의 유지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던, 적극적 개혁주의자, 자유주의자라기 보다는 현실중시의 정치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65년4월9일 남북전쟁이 끝나고 1865년12월6일 연방의회가 헌법 13조 수정조항을 통과시킴으로써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노예제도는 남의 나라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세상 그 어느 곳 못지않게 참혹한 노예제도가 조선시대말까지 존속했었다. 우리나라의 노예제도는 고조선이래 전쟁과 채무불이행 등으로 노비가 수급된 이래 그 유구한 노비의 역사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유지되어 왔다. 다소 부정적으로 규정하자면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 중 대부분은 노비제도라는 하부구조, 즉 생산수단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조상이 노비라는 것을 알고싶지도않고, 안다하더라도 드러내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모르더라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구의 약 1/3 이상은 자신의 조상이 노비였다는 불편한 사실을 마주하리라 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책에 근거해서이다. '성종대에는 전국의 호구가 100만호에 인구 340만명으로 집계된 가운데 노비의 수효가 무려 150만 명에 달했다.' (조선노비열전, 202쪽, 이하 열전)
1609년 (광해군 1)에 작성된 울산의 6개 군, 면의 호적에는 2009명 중 48.6%가 노비로 기재되어 있다. (열전 202쪽) 1484년 (성종 15) 推刷都監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가 340만 명 정도였는데, 공노비의 수효는 35만명에 달했다(열전 116쪽) 등등.
노비제도의 역사에서 보면 조선시대에 인륜적 차원에서, 국가재정 충당을 위한 양인 확충의 필요에서 노비의 면천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노비라 하여도 엄연한 자신의 백성인데, 소유와 사용, 매매를 넘어 심지어 형벌까지도 노비주인에 의해서 함부로 저질러지는 것은 유교이념에서 한참을 넘어선 월권이 아닐 수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인화 노력은 번번이 힘있는 양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의 노비는 마소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사고팔렸고, 자식까지 면면히 노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노비의 자식은 노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한다. 역사상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 다음과 같은 윤음(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訓諭) 성격의 문서)을 내린 적이 있다. '벌하고 상 주는 권한을 가진 군주도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데 아무리 천한 노비라 하여도 주인이 제 멋대로 죽이게 해서야 되겠는가. 군주의 덕은 살리는 것인데 ---, 또한 불로 지지거나 코와 귀를 베거나 얼굴에 글자를 새기거나 발을 자르거나 쇠, 칼, 나무, 돌을 사용하여 함부로 참혹하게 노비를 죽이는 자가 있으면 그 주인과 가족을 공노비로 삼으라.' (열적 109쪽) 당시의 노비를 취급하는 실상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는 것이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이 아니고, 마소보다 못한 존재임에랴. 양반들은 자기들의 재산은 자기 뜻대로 처분하하는데 임금조차도 간섭해선는 안된다는 이유로 그들의 재산을 지켰다. 당연히 임금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노비의 현실이 참혹했다고 한다. 자기나라에서 같은 민족이 그런 대접을 받는데, 외침에 의하여 끌려간 수많은 부녀자들이 거기에서 당한 치욕을 어느 누가 눈꼽 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졌을 것인가.
노예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서는 노비라는 이름으로 오랜 세월 동안 세상 많은 곳에서 인간의 일부는 피지배자로서 족쇄 지워지고 일생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갔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지구상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는 아직도 인간에 의한 인간 유린이 자행되고 있다. 멀리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주변의 고용, 하도급, 하청, 납품 등 흔히 '갑과 을'로 맺어지는 수많은 계약관계에서 동등한 당사자 관계는 찾아볼 수 없고, 한쪽이 다른쪽을 지배하는 예속관계는 관행이 되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의 인격은 약육강식의 야만성에 내몰려지고 있다. 과연 우리 자신은 이러한 불합리성에서 떨어져 있는가. 자신에게만은 관대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반성함에는 게으로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