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는 기원전 660년 제1대 진무천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나 고고학상으로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다. 일본의 중요한 사료는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편찬자들이 1,370여년을 소급하여 기술한 것이므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중국쪽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일본천황 계보의 실재성이 인정되는 것은 제33대 스이고 천황(592~628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열도에 흩어져 씨부족 형태를 이루던 일본은 강력한 지배자가 나타나면서 차츰 국가 형태를 이루게 되었고, 4~5세기에는 이러한 나라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 나라가 야마토 호족들이 세운 야마토 정권이다. 그러나 천황을 비롯한 호족들의 갈등으로 야마토 정권은 6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가 가문이 황실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해지고 전횡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나카토미 가마타리가 소가 가문을 타도하고 모든 토지와 인민을 국가 소유로 한다는 다이카 개신을 추진했다. 다이카 개신을 계기로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천황족의 우세가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율령정치가 시행되었고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자 수도도 건설했다. 다이카 개신 이후 천황 혈통인 황자가 세습해 정치를 담당했으나 얼마후 승려와 후지와라 가문이 권력투쟁을 벌여 후지와라 가문이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들의 권력은 헤이안시대까지 이어졌다.
후지와라 세력의 섭관정치는 10세기 말에 절정이 이르렀으며 이들의 권력은 그들이 소유한 사유지인 장원이 원천이 되었다. 장원의 소유주인 영주는 수도에 살면서 토지 관리를 위해 장관(관리인)을 파견하거나 지방의 호족을 임명하였으며, 호족들의 수족으로서 명주라고 불리는 중소 지주들이 실제 무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들은 호족과 직접 결합되어 있었으며 차츰 주종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무사집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세기 중반 교토에서 조정의 내분을 둘러싸고 발생한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은 귀족시대에서 무사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무사로서 맨 처음 정권을 장악한 것은 미나모토를 제압한 다이라 가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이라 가문이 전횡을 일삼으며 세도를 과시하자 귀족의 반발은 커져갔으며 도코쿠에서 다이라 가문 타도를 외치며 일어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다이라 가문을 단노우라에서 전멸시키고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개설(1189년)함으로써 무사정권은 요리토모를 시작으로 메이지 유신(1868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몽골 침공(1274년, 1281년) 이후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해서 1333년 가마쿠라 전투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50여년간 전쟁의 남북조 대립시대를 거쳐 바쿠후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교토의 무로마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요시쓰미 시대에는 바쿠후의 세력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쇼군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으나 이후 오닌의 난(1467년) 발생 이후 센코쿠 다이묘가 영지 확장에 몰두하는 전국시대가 펼쳐졌다.
100년간 계속된 전국시대에 각 지방에서 일어난 무사 세력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싸움이 되풀이 되는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바쿠후를 타도하고 천하 통일의 발판을 만들었으며 이를 이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6년 일본 천하통일에 성공하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정치 재능, 강력한 경제력이 뒷받침된 월등한 군사력,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여 시의적절한 새로운 정책을 변화있게 실행해 나간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전란이후 몰락한 다이묘와 호족, 일반 무사 등의 불만을 해소하고 세계에 위엄을 떨쳐 보겠다는 일종의 대아시아 제국 건설을 꿈꾸는 과대망상에 빠져 분로쿠, 게이초의 전쟁으로 불리는 조선 침략(1592년)을 감행하였으나 정유재란 중인 1598년 병사하게 되었으며, 이를 이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에도에 바쿠후를 설치하여 에도 바쿠후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이후 에도는 250여년간 국가 정치의 중심지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에도 바쿠후 시대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어 도시가 번영하고 무사와 시민들은 사치에 빠져 호화 풍조가 판치게 되었다. 한편 1853년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 등 외국 선박들이 일본에 내항해 개항을 요구하자 이후 일본 내에서는 봉건 체제보다 한층 강력한 정치 체제를 요구하는 세력들이 나타났으며 쇄국으로는 더 이상 국가를 끌고 갈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되었고 바쿠후 지지파와 개혁파 사이에 결렬한 싸움이 이어졌으며 공무합체와 존왕양이의 여론이 대립되게 되었다. 이 같은 조류에 편승한 조정은 이와쿠라 도모미와 바쿠후 정치에 실망한 사쓰마 번과 죠슈 번 등의 젊은 무사들과 함께 왕정복고를 실현하였으며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메이지유신(1868년)을 단행하고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역점을 두고 제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황실 재정을 튼튼히 하고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려고 국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을 뿐 아니라 추진방법이 지나치게 전제적이고 독단적이었으며 이에 분개한 민중은 자유민권운동을 일으켰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제국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제국의회가 1890년 11월 역사적인 막을 올리게 되었다. 조선의 동학운동을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아시아의 열강으로 부상했고 자본주의도 궤도에 올라 서양제국과 함께 해외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조선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남진 정책을 추진하는 러시아와 충돌해 마침내 러일전쟁이 발발했으나 러시아를 격파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로 세계열강 대열에 오른 일본은 아시아에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해나가는 한편 중국에 대한 이권을 확대해 나갔으며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패망한 일본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평화주의에 입각한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걸음을 내딛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과의 강화를 체결하며 다시 독립을 확보하고 국제연합에 가입해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전후 일본은 근면과 끈기로 열심히 일해 눈부신 속도로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세계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