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읽었던 책 중에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라는 책이 있었다. 조선의 선비사상이 유교의 이상주의를 구현한 것이라 장황하게 자랑하지만 정작 그 이상을 실현하고 현실에서 실천해 나가는 인간으로서의 선비는 누구하나 자랑스레 내세울 수 없는 현실을 비꼬는 책으로 기억된다. 이 책도 이러한 뉘앙스가 깊이 느껴지기에 선택하게 되었는데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 내 생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 박영규는 '역사 대중화의 기수', '실록사가'라는 찬사를 받은 대중 역사 저술가로서 근 20여년간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를 써 내오고 있는 바, 이 책은 그 간의 실록 시리즈 과정에서 체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서술하였다.
무릇 인간의 본능적 욕구 중에서 가장 강력한 두가지는 식욕과 성욕을 들 수 있는데, 이 두가지 욕구가 상호작용하여 인간의 문명발전을 이룩하는 커다란 동기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경우에도 보면 장쾌한 전쟁, 재치 넘치는 삶, 거센 물결을 헤치며 유혹의 바다를 건너 원하는 바를 이루를 리더십 이야기,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를 물리친 모험 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남직한 인간사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여있지만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에로스, 즉 성적 본능이 그 서사의 곳곳에 가득 넘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허기를 채우려는 노력은 수렵과 채칩에서 위주의 사회에서 농경을 불러왔고 다시 산업혁명을 거쳐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현대 정보화 사회의 근간이 되었듯이, 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인간의 문화와 예술의 지평은 더욱 확대되어 왔다고 할 수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식욕은 생존에, 성욕은 번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존은 가장 절실한 현실의 문제였고, 번식의 향후 닥쳐올 미래의 문제였으므로 늘 배고픔에 고통스러웠던 인간은 당장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의 욕망이 성욕에 족쇄를 채우고 이를 금기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배고픔을 해결한 소수의 권력자들은 이러한 금기에 구속받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을 마음껏 해소할 수 있었으며, 대신 힘없는 피지배자들의 욕망은 법, 신분, 제도의 틀을 이용하여 철저히 억압하였다. 시대를 불문하고 성적으로 패쇠적인 사히에서 가장 자유분방했던 존재는 힘있고 권력있는 남성이었다. 신분격차가 크고 남녀간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힘 있는 남성은 여성을 상대로 마음껏 성적 유희를 즐겼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은 성적 희생물로 전락했다. 조선은 그러한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회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선비의 나라, 은자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등은 모두 조선을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앞의 선비론을 평한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이러한 미사여구의 뒷면에는 수많은 피지배계층, 특히 여성들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 일상화된 폐쇠적인 사회임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이 틈을 파고 들어 조선시대의 성적현실과 그 속에서 사랑에 고뇌하는 민초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저자는 조선시대의 춘화와 육담, "조선왕조실록"ㅇ[ 숱하게 남아있는 섹스 스캔들의 내용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조선인의 성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에로틱 심벌이 된 여인들'에 대해 말한다. '에로틱 심벌'이란 성적 본능을 자극하고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1장. 말을 알아듣는 꽃, 기생, 2장, 왕만 바라봐야했던 여인들, 궁녀, 3장. 여의와 약방 기생 사이, 의녀, 4장. 눈치 백 단, 눈물 백 근의 설움, 첩의 생활을 통해 시대적 희생양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애환을 다루고 있다.
제 2부는 '춘화와 육담의 에로티시점"이다. 에로티시즘이란 정욕을 부추기는 사상이나 행동을 말하며, 여기에는 직접적인 성행위뿐만 아니라 성적 이미지는 불러일으키는 유무형의 것들이 포함된다. 5장. 에로틱 아트, 춘화, 6장. 욕정과 로맨스의 바로미터, 육담을 통해 조선의 사회상과 성 풍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제 3부는 '조선의 섹슈얼리티와 스캔들'이다.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성욕과 성행위, 이와 관련된 사회제도와 규범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7장. 조선의 섹스 스펙트럼, 8장. 궁중을 뒤흔든 스캔들 등을 통해 성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각을 가장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앞의 선비론과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그 근저에 에로스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에로스는 인간의 본능이기에, 어떤 힘으로 억누르고 막으려고 해도 결코 막을 수 없듯이 우리가 어떤 시대를, 역사서를 통해 파악할 때는, 표면상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말고 그 근저에 작용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파악해야만 진정한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면목에 접근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