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자본주의 세속의 규율에서 다소 비켜서 있는 듯한 주변부의 존재들이다. 인물들을 무조건적인 연민의 대상으로 포섭하거나 그들을 위해 영웅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작가는 주류 질서를 비껴가는 고유한 목소리를 차분히 들려주면서도 인물들의 내면에 간직한 이상적 세계에 대한 열망을 주시하게 한다.
1.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주인공은 3년 동안 경영해 온 1인 출판사를 정리하게 된다. 경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장인에게 빚을 진 채로 폐업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독자가 책을 교환해 달라고 연락을 취해온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그녀의 독특한 외양과 라이프 스타일에 호기심을 느끼며 서서히 만남을 갖는다. 주인공은 자기 세계에 대한 충만과 고독, 열패감이 뒤섞인 이상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아웃사이더의 세계에 대한 나의 동질감과 환상도 오래가지 않아 깨지게 된다. 유럽에도 가본 적이 없는, 중고 거래와 취미 강습으로 삶을 이어온 사람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경쟁 체제에서 밀려난 이들의 허위의식과 좌절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도 예술 대 삶, 이상 대 현실이라는 도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장인과 아내는 주인공을 이해 못하지만 이들이 단순한 속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생활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결국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우리가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 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이라는 공감이다.
2. 새 보러 간다.
편집자로 근무하는 김수정은 프리랜스 큐레이터인 윤과 출판계약을 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미팅 자리에 나간다. 현대미술가 현석경의 작품에 대한 리뷰로 유명해진 윤은 타인의 콘텐츠를 수집, 리뷰, 가공하는 수집가형 예술가이다. 독자적인 콘텐츠를 지닌 것도 아닌데, 까다로운 예술가의 포즈를 취하며 과시적인 행동을 보이는 윤 때문에 김수정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편집자 앞에서 온갖 생색을 내던 윤은 현석경에게 자신의 존경과 열정을 표출하려고 하나 현석경은 그를 작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 이 소설은 냉정한 오리지널리티에 의해 상처 입는 수집가인 윤의 모습을 세심히 그려낸다. 윤은 모욕을 겪으면서도 정작 현석경이 제안하는 일자리 앞에서 현실적으로 갈등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수정은 텅 빈 거리에 다시 나타난 윤과 함께 조용히 걷기 시작한다. 그 장면은 모욕과 압력 속에서도 힘겹게 수렴되고 다시 뻗어나가야 하는 일상의 본질을 포착함으로써 깊은 여운을 준다.
3. 모리와 무라
숙부는 오래전 자신의 비정함 때문에 함께 일하던 사촌이 자살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괴로워 한다. 엄마와 숙부와 함께한 온천 여행에서 숙부는 소리를 지르고 개들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가정과 사회에서 겪은 폭력이 인물들에게 어떤 외상을 남기고 그것이 어떻게 결벽으로 이어지는가가 잘 나타난다.
4. 쇼퍼, 미스터리, 픽션
예술과 삶의 경계를 새롭게 배치하는 소설쓰기에 대한 탐구로 이야기를 집중한다. 이 작품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창작하는 인간이 끊임없이 부딪치는 내밀한 순간들을 포착한다. 자기가 뭔가를 참아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각은 창작에 대한 고민을 추동하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가 팔다 남은 과일을 몰래 건네주던 기억, 학교에 들어가기 싫어 교문에 매달려 몸을 흔들다가 떨어진 교문에 깔려 죽은 아이에 대한 기억은 주인공의 내면에 오래도록 고여서 삶과 픽션의 경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5. 레이디
십대들이 친구 사이에 느끼는 우정과 성애의 감정은 펜팔로 만나는 우정과 현실적 우정이라는 두 겹의 이야기를 통해 섬세하고도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나'와 친구가 바닷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경험한 성애와 경이로운 사랑은 아무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금기의 비밀로 가슴에 남게 된다. '나'는 들키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 속에서 성적 경험을 은폐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기억이 된다. 십대 소녀의 세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성적 체험과 감정의 얽힘을 사려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