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이다. 첫 희곡 [인간]은 통상적인 희곡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소설로도 희곡으로도 읽혔다. 하지만 작가가 연극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을 2인극 형태의 [인간]은 프랑스에서 즉시 무대에 올려졌고, 2010년 국내 초연을 시작으로 한국 관객들과도 만났다. 2015년에 출간되었지만 국내에 뒤늦게 번역 출간되는 [심판] 역시 프랑스에서 무대에 올려졌으나, 올 가을에도 새로운 연출가에 의해 다시 한번 프랑스 관객들을 마날 예정이라고 한다.
심판은 폐암 수술중 사망한 판사 아나틀 피숑이 천국에 도착해 천상 법정에서 다음 여정을 위한 심판을 받는 내용이다. 재판장인 가브리엘, 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인 카를린, 그리고 구형을 맡은 검사 베르트랑이 아나틀 피숑의 지난 생을 조목조목 평가해 환생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주로 이 4명의 대화로 구성된 내용으로 전작 [타나토느트]의 심판 장면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탓에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와 친밀한 독자는 이번에도 전생과 환생 이야기야? 하는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등장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촌철살인의 대화와 베르베르식 유머는 이런 우려를 씻어 주면서 참신하고 유쾌한 독서를 선사한다.
베르베르의 작품에서 유머는 주제와 상황의 무게로 발생하는 긴장감을 풀어 주기 위해 쓰이는 필수 장치이다. [죽음]의 주인공은 가브리엘은 떠돌이 영혼 신세인 할아버지를 만나는데, 할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손자에게 시종일관 농담을 건넨다. [좋은 책은 결국 한마디의 멋진 농담 같은거 아니겠니]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악당 쇼브 박사는 강제로 뇌에 전기 충격을 당하고 실신했다 깨어난 주인공 르네에게 기억력이 좋은 꼴 요리가 포함된 병원식 메뉴를 익숙하게 설명해 준다.
베르베르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웃음은 폭소보다는 실소에 가깝다. 전형적인 언어유희와 허허실실한 농담에도 능하지만 그의 장기는 역시 타자적 시선을 통한 특유의 비틀기다. [개미]와 [고양이]의 눈에 비친 덩치 큰 포유류 인간, 떠돌이 영혼들과 천사들이 내려다보는 현생의 육신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 헛웃음이 나온다. 죽어서도 손에 끼었던 반지에 집착하고 상속세 때문에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심판]의 주인공 아니틀은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베르베르는 [죽음]에서 누가 봐도 그의 분신인 듯한 작가 가브리엘을 통해 스스로를 자조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한다.
[심판]의 재미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역할의 설정에도 있다. 피고인 아나틀이 죽기 전에 가졌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판사였다. 전생에 부부였던 카를린과 베르트랑은 이혼의 앙금 탓인지 천상에서도 서로를 원망하면서 역할이 뒤바뀐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재판장 가브리엘이다. 영혼의 환생 여부를 판단하고 지상의 태아와 짝짓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전문가답지 못한 허술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마음 약한 이웃 사람같은 그녀는 피고인의 요구에 끌려 다니며 쉬이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하긴 한 인간의 삶에서 선업과 악업의 가려내는 게 어디 바둑판에서 흰돌과 검은 돌을 골라내는 것과 같은 일이겠나. . . . .
법정의 불이 꺼진다. 아나틀이 수술을 받은 곳과 흡사한 수술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한 여성이 누워 있고 한 남성이 팔에 아기를 안고 있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린다.
[심판]은 만성적인 의료계의 인력 부족, 교육 개혁, 법조계 부패 같은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고, 결혼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있게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대다수 작품이 그렇듯 핵심 주제는 여전히 운명과 자유 의지의 문제다. 피고인 아나틀 피숑이 심판 과정에서 스스로 진화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고민과 성찰을 드러낸다.
지상과는 다른 가치 체계와 도덕 규범이 작동하는 천상 법정의 떠들석한 [심판]을 구경하다 보면 희곡 한 편이 단숨에 읽힌다. 프랑스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던 [심판]이 한국에서도 무대에 오를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