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은 내게는 참 고마운 분이시다. 학창시절이나, 직장인이 된 지금이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삶이 힘들때면 언제든 힘이 되어주신 분. 개인적으로 전혀 친분은 없지만, 그분이 정성스레 써내려간 시와 수필들은 너무 따스했다. 그 따스함이 좋아, 연애시절 그리고 신혼초기에 남편에게 매일아침 수녀님의 시 한편씩을 메일로 보내주곤 했었다. 그분의 글로 아침편지를 대신했던 셈이다. 그랬던 내가 한동안 수녀님 책을 못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알게된 고운 책이 있어 다시금 따스함을 느끼고 간다.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 말과 마음을 곱게 쓰면 꽃보다 아름답고 빛보다 밝은 사람이 되나보다. 제목에서도 그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마음과 말이 나에게도 스며들게 하고 싶어 수녀님의 시를 몇편 곱씹고 곱씹어 보았다. 특히 요즘 계절인 겨울에 맞는 시들이 가슴에 와닿았다.
1. 겨울편지
친구냐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어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본다
2. 겨울밤
귀에는 아프다
새길수록 진실인 말
가시돋혀 있어도
향기를 가진
어느 아픈 말들이
문득 고운 열매로
나를 먹여주는 양식이 됨을
고맙게 깨닫는 긴긴 겨울밤
3. 12월의 노래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4. 어여쁜 눈사람이 되어
부질없는 근심도
끈적거리는 우울도
모두 눈속에 녹아라
어둠을 걷고
밝게 웃는 하얀세상에
나는 다시 살고 싶어라
나는 당신의 어여쁜
눈사람이 되어
당신의 가슴 속에서
5. 겨울산에서
죽어서야
다시 사는 법을
여기 와서 배웁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모든 이와 헤어졌지만
모든 이를 다 새롭게 만난다고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 산길에서
산새가 되어 불러보는
당신의 이름
눈 속에 노을 속에
사라지면서
다시 시작되는
나의 사랑이여
6. 설날아침
햇빛 한 접시
떡국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 먹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빠도 엄마도
하늘에 가고
안 계신 이 세상
우리집은 어디일까요
일 년 내내
꼬까옷 입고 살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 집으로
다시 가고 싶네요
식구들 모두
패랭이꽃처럼 환히 웃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네요
7. 겨울 산에서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나목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 전의 나를 찾았네
8. 겨울잠을 깨우는 봄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잠시 쉬고 나면 새 힘을 얻는 것처럼
겨울 뒤에 오는 봄은 깨어남, 일어섬, 움직임의 계절
'잠에서 깨어나세요'
'일어나 움직이세요'
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소녀처럼
살짝 다가와
겨울잠 속에서 안주하려는 나를 흔들어댄다
9. 겨울이 잠든 거리에서
앞 사람이 남기고 간 외로움의 조각들을
살얼음처럼 밟고 가면 나도 문득 외로워진다
아이들이 햇빛과 노는 골목길에서
경이로운 봄을 만난다.
조무래기들이 흘린 웃음을 받아 가슴에 넣고
겨울이 잠든 거리에 기쁨의 씨를 뿌리며 걷고 싶다.
10. 겨울 엽서
오랜만에 다시 온
광안리 수녀원의
아침 산책길에서
시를 줍듯이
솔방울을 줍다가 만난
한 마리의 고운 새
새가 건네 준
유순한 아침인사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파밭에 오래 서서
파처럼 아린 마음으로
조용히 끌어안던 하늘과 바다의
그 하나된 푸르름을
우정의 빛깔로 보냅니다.
빨간 동백꽃잎 사이사이
숨어 있는 바람을
가만히 흔들어 깨우다가
멈추어 서서 듣던 종소리
맑음과 여운이 하도 깊어
영원에까지 닿을 듯한
수녀원의 종소리도 보내니
영원한 마음으로 받아 주십시오.
수녀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운 말들로 제 마음을 밝게 비추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