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동남쪽 - 함양, 산청
50년간 서울에서만 살아본 서울촌놈이자 대전인 친가, 개성쪽인 외가, 안동인 처가라는 뒷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함양, 산청이라는 지명은 이름만 들어봤지 바닷가인지 강가인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독서를 통해 그런 지역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한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즐거움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함양, 산청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보석들과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학계, 법조계, 방송계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인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정치의 영역으로 옮기면서 그간의 명성을 잃게 되고 더 나아가 본인이 몸담았던 분야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도를 저하시키는 사례가 빈번한 최근의 세태와 비교되어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기 분야의 거목으로 남는 원로들이 그립고 아쉽게 느껴졌다.
영주 부석사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부석사를 방문하기에 앞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책을 통해 사전 지식을 준비하고 답사를 가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방법이라면, 다녀온 후 책을 다시 읽은 것 또한 큰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시각적 추억과 함께 여행지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 (식당, 숙소 등)이 다시 떠오르며 여행의 맛을 다시 한번 음미 할 수 있었다. 힘들게 계단을 오르고 나서 마주한 무량수전의 모습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으나 (물론 우리나라 最古의 목조건축물 이라는 이름값에 압도된 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고개를 돌렸을때 눈에 들어온 부석사의 앞마당 - 소백산의 끝없이 이어지는 물결은 지금도 무엇과도 비길 수 있는 청량감을 선물해 주었다.
석굴암
내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시기는 1986년 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위한 카운트다운이 한창이던 때였다. 우리학교가 묵고있는 숙소 앞마당으로 각종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왔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품목중의 하나가 석가탑, 본존불상 등의 석재 모형이었다. 아마도 다보탑은 이미테이션으로 제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석재 재질로 해서 그럴듯 하게 만들어진 본존불상은 다양한 크기로 전시되어 친구들을 유혹했고 꽤 많은 친구들이 본존불상 석재 모형을 구매하였다. 하지만 노점에서 그토록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는 불상이 돌을 깍아서 만들었을리 없고 수학여행지에서의 남자 학생들이 그 기념품을 소중히 간직할 리도 만무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조악한 재질의 불상은 머리부터 분리되기 시작했고, 여행의 마지막날 짐을 챙겨 숙소를 떠날 때는 참수형 내지 거열형에 처해진 부처님의 안쓰러운 잔해가 방바닥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그 이미지가 꽤 오랬동안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인간의 무지와 오만으로 인해 석굴이 감내해야 했던 부당한 수난을 읽다 보니 결국 우리의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천박한 태도가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저들이 행했던 수많은 야만스러운 `보존`절차에 대하여 비난 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2020년 오늘 우리는 6~70년대 벌어진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책에서 다룬 평창, 정선 아우라지, 청도 운문사, 부안 변산, 고부 등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수많은 답사처들이 지금도 우리들의 방문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여행 계획을 짜야겠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읽는 내 모습을 대변한 문장을 인용하며 후기작성을 마칠까 한다. "우리 문화가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그것이 혹 국수적인 자기고집이 아니가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엔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 중국의 자금성, 인도의 타지마할 깥은 세계적인 유물과 비교하면 초라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요. 저 처럼 멍청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도 쓰실 수 있다면 써주세요. 실은 제 주위엔 그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