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대자연의 예찬과 함께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불멸의 고전인 월든은 19세기에 쓰인 가장 중요한 책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열림원에서 펴낸 소로 탄생 200주년 기념 특별판(김석희 완역)을 읽었다. 이 책에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월든 호수와 그 주변 풍경 사진 66점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로가 생활하던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월든은 미국의 시인이며 사상가이자 실천적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45년 7월 4일부터 2년 2개월 동안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지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했던 것 들을 쓴 글이다.
세계 문학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수필이라고 하기엔 시적이고, 시라고 하기엔 좀 더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딱히 어느 장르라고 구분하기가 애매할 정도로 그 형식이 자유로운 책으로 평가받는다.
글을 읽으면 풍경이 떠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서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담고 있는 내용들이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아름답다.
월든 호수를 실제 가보신 분들의 말씀, "가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평이한 호숫가이고 그가 살았던 작은 오두막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류시화 시인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그의 발자취를 걸어보고 영감을 얻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무소유 정신을 배우시고 실천하신 법정 스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 등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그 속으로 한 번 빠져 볼 일이다.
산업화가 물질만능 시대가 막 시작되던 170여 년 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눈에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재산의 노예이자 일의 노예로 비쳤다. 그는 인간이 애써 그렇게 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의도대로 인생을 살아보기 위한 때문이었다. 직접 지은 작은 통나무집에서 그가 꿈꾸어 왔던 단순한 삶을 시작했다. 숲에서 얻거나 손수 경작한 것으로 식량을 얻고 명상과 자연관찰, 산책과 독서를 하고 밤에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글을 씁니다. 과소비와 중노동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자발적 빈곤을 선택하고 그렇게 얻은 자유로 영혼을 돌보고 삶을 성찰하는 소로를 통해 간소한 삶과 자연과의 교감이 선사한 참다운 삶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재결성하는 자리에서 오프닝 메시지로 소개되기도 한 그가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이다. 그는 삶을 깊이 살고 싶었고, 삶의 정수를 죄다 흡수하고 스파르타인처럼 강인하게 살아서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파괴하고 싶어 했다. 삶을 구석으로 몰아넣어 가장 낮은 한계까지 끌어내리고, 그리하여 삶이 천박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천박함의 적나라한 전모를 포착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해도 인생의 가르 참을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 죽을 때 내가 인생을 헛산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념하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중)
소로는 자신이 숲을 택한 이유로 바구니를 팔러 다니는 인디언 행상의 일례를 소개하고 있다. 자신이 오직 할 수 있는 일인 바구니를 만들어 유명한 변호사에게 하나 사달라고 했지만 필요가 없다고 하자 "우리를 굶겨 죽일 작정이군!"하고 소리쳤다. 가치가 있는 다른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는 인디언과 달리 어떻게 하면 바구니를 팔지 않아도 될 것인가를 궁리한 끝에 숲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사업 밑천이 들지 않고 가능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사업을 하려는 데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로 간소하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일을 백 가지나 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로 줄이도록 하자. 백만 대신 대여섯까지만 세고, 계산 결과는 엄지손톱 위에 적어두도록 하자. 문명생활이라는 이 험한 바다 한복판에서는 먹구름과 폭풍과 암초 등 수많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중)
소로는 농장과 집 등을 물려받은 젊은이들이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 땅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빚더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지나친 노동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학생이 읽어 주기를 희망했다.
"나는 이 책을 특히 가난한 학생들이 읽어주었으면 한다. 그 밖의 독자들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대목만 받아들이면 된다.{중략} 외투는 몸에 맞는 사람에게나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말이다. {중략} 이곳 뉴잉글랜드에 살고 있는 여러분의 상황, 특히 이 세상과 이 마을에서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지금처럼 나쁜 상황이 과연 불가피한 것인지, 개선될 가망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경제생활 중)
철학적인 소로의 면도 많이 볼 수 있다.
"한 농부가 '사람이 푸성귀만 먹고는 살아갈 수 없잖소. 푸성귀에는 뼈를 만들 성분이 없으니까.' 그는 쟁기를 끌고 가는 소를 뒤따라가고 있는데, 그 소의 뼈야말로 풀만 먹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하나의 실험이다." (경제생활 중)
"오늘날에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있어도 철학자는 없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관용과 신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경제생활 중)
당시에는 열차 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이 나던 시절이었기도 했겠지만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라)을 외치는 듯한 그의 글에서 섬뜩한 악담처럼 들릴 만큼 강력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정거장에 몰려들고 차장이 '발차!'를 외쳐도, 막상 기관차의 연기가 걷히고 수증기가 물방울이 된 뒤에 보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기차에 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문은 '안타까운 사고'라고 부를 것이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 차비를 번 사람, 그러니까 그만큼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마침내 기차를 탈 수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여행하고 싶은 의욕도 기력도 잃어버린 뒤일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가치가 최저로 하락한 노년기에 확실치 않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를 돈벌이로 소진하는 사람을 보면, 훗날 고국에 돌아와 시신의 삶을 살겠다며 인도로 돈을 벌러 떠났던 어느 영국인이 생각난다. 그는 인도로 가는 대신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부터 썼어야 했다." (경제생활 중)
그러나 그의 시적이면서도 서정적인 글에는 오묘하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내 집 위를 스쳐가는 바람은 산등성이를 휩쓰는 바람이어서, 지상의 음악 가운데 끊어진 선율, 천상의 음악처럼 아름다운 소절만 전해 주었다. 아침에는 바람이 쉴 새 없이 불고, 창조의 시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을 듣는 귀는 드물다. 속세를 벗어나기만 하면 올림포스 산은 어디에나 있다."
또 이런 글도 있다.
"<하림밤사, 인도 고대 서사시 중>에는 '대들이 없는 집은 양념하지 않은 고기와 같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내 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새들의 이웃이 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새를 잡아 가두어서가 아니라, 새들 가까이에 우리를 짓고 거기에 나 자신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원과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리는 새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는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 전혀 또는 거의 없는, 더욱 야생적이고 감동적인 숲속의 노래꾼 들인 개똥지빠귀, 풍금조, 방울새, 쏙독새, 그 밖의 많은 새들과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중)
"해가 떠오르면 호수는 안개 옷을 벗어던지고 여기저기서 부드러운 잔물결과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안개는 밤의 비밀 집회를 막 끝낸 유령들처럼 살금살금 사방팔방으로 물러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산 중턱에 있기 때문인지 이슬도 다름 곳보다 늦게까지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중)
독서에 대한 글을 보면 동양 고전 노자에 나오는 나비이야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교류하는 길로 독서를 꼽고 있다.
"옛날 그렇게 대담했던 자는 그 철학자 안에 있는 나였고, 지금 그 모습을 회상하는 자는 내 안에 있는 그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또는 "시인 미르 카마르 웃딘 마스트(인도 시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만히 않은 채 정신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이점을 나는 책 속에서 얻었다. 한잔 술을 마시고 취하듯이 나는 현묘한 교리라는 술을 마시고 이 즐거움을 맛보았다.'라고.." (독서 중)
그리고 고전의 중요성에 대하여도 기술하고 있다.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사상의 기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전이야말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는 델포이나 도도나(제우스의 신탁소)도 줄 수 없는 가장 최근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연구를 그만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독서 중)
비나 눈이 오늘날, 특히 밤에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결국, 우리가 가까이 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우리 생명의 영원한 원천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냐고, 고독만큼 편안한 친구가 없으며, 오히려 방에 혼자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 고독하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우주 간에서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기 있는 저 별의 너비는 우리의 측량 도구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데,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왜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시죠? 우리가 사는 행성인 이 지구도 은하수 안에 있잖아요? (고독 중)
시적이고 예언자적 성격을 띠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런 경구적 표현은 그가 원전으로 애독한 그리스-라틴 문학, 또는 동서양의 경전들, 초서나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국 고전문학 등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른다고 새벽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과 같다. 우리가 자지 않고 깨어 있는 날에야 새벽이 찾아온다. 새벽은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맺는 말 중)
소로는 생전에 유머감각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고 하는데 그의 고지식한 모습이 책에 담긴 때문일까? 길고 복잡한 단락 등을 자주 사용한 그의 글은 읽기가 만만치는 않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17에 메사추세스 콩코드에서 태어나 1862년 45세의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다. 하버드대를 졸업했으나 안정된 직업을 갖지 않고 약 5년간 측량 일이나 목수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을 썼다. 그는 1845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월든호수 숲속으로 들어갔으며, 숲 생활을 마치고 나온 이후 숲에서 나이테를 세다가 걸린 독감으로 고생하다가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소로는 <월든>의 소재 대부분을 자신의 일기에서 얻었다. 1839년 4월부터 1854년 4월까지 거의 반생에 걸친 사색의 집대성이었다. 결국 자연과 함께 산 그의 충실한 생활 기록이자 "인간의 주요 목적은 무엇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